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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은 세종대왕이 눈물을 흘리고 계실 수도내가 이러려고 한글을 만들었나

『한 베이비가 태어나면 캐시미롱 포대기 속에서 플라스틱 젖꼭지를 빨며 죠니 크랙카와 스마일쿠키를 먹고 코카콜라나 펩시를 마시며 자라난다. 프로 권투의 타이틀 매치를 관전하며 피 흘리는 KO승에 부라보를 외친다. 더 자라면 팝송이나 재즈뮤직에 넋을 잃고 아디다스 티셔츠에 고고 디스코를 추며 아이템풀 엣센스 국어광사전 콘사이스로 공부하여 대학입시를 보며 커트라인에 들어야 패스한다. 맨션 아파트에서 나와 스쿨버스를 타고 캠퍼스에 가면 채플을 보고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후 총장 리셉션에 가서 커피 한 잔에 슈가를 세 스푼 넣어 마신다.』

 

이 글은 우리 삶에 스며든 서양말이 얼마나 되는지, 어떤 분이 풍자해서 1987. 10. 9. 자 동아일보에 쓴 글이다.

30년 전에 쓴 글이라고 믿기 어렵다. 바로 지금 우리 현실을 그대로 내다보았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 글을 지금 시대에 맞게 살짝 고쳐봤다.

 

『한 베이비가 태어나면 캐시미어 포대기 속에서 플라스틱 젖꼭지를 빨며 마미를 배운다. 마카롱과 마시멜로를 먹고 코카콜라와 햄버거를 먹으며 자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영어 유치원을 다닌다. 아디다스 트레이닝 복을 입고 노스페이스 파카를 교복처럼 입고 다닌다. 팝송을 듣고 랩을 따라 하며 아이돌을 꿈꾸며 자라난다. 조금 더 자라면 유에프씨를 보며 피 흘리는 KO 게임에 파이팅을 외친다. 대학 캠퍼스에서는 한글이 아닌 토익이나 토플을 준비한다. 직장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커피숍에서 커피를 테이크 아웃한다.』

 

이 글에서 거의 반 정도가 외국말이다. 내가 초등학교(난 국민학교를 졸업했다)나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한문을 쓰면 유식한 부류에 들어갔다. 특히 그때 어르신들은 편지나 뭔가 종이에 적을 때도 한문을 많이 쓰셨다. 그렇게 하는 것이 멋진 사람으로 보였다. 또 그래야 사람들이 우러러보았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는 한문이 교과목 가운데 하나였다. 시조 하나쯤 외우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식하다고 한다. 대학 때 배운 법학 관련 교과서는 한문으로 쓰여 있었다. 처음에는 몇 페이지 읽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는 말할 때 영어를 섞어 써야 했다. 그래야 세련되고 뭔가 있어 보였다. 팝송 하나쯤은 외우고 있어야 어디 가서 ‘쪽’ 팔리지 않았다.

 

특히 지금도 공무원들, 이른바 행정을 한다는 사람들은 기획안이나 짧은 보고서(보통 ‘원페이퍼 보고서’라 부른다)를 쓸 때 어려운 한자말이나 영어를 많이 쓴다. 예를 들어 초중고 학생들이 ‘대여성악성범죄 근절 대책’이라는 문구를 보았을 때 그 의미가 확 와 닿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예는 많다. ‘교통사고 잦은 곳’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교통사고다발구역’이라고 한다. ‘보행자 사고다발구역’도 마찬가지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사고가 많이 일어나니 주의해서 다녀야 한다고 미리 알려주는 말이다. 그런데 초등학생이 이런 문구를 보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표지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간표’나 ‘계획 일정’이라고 하면 될 것을 ‘○○타임테이블’이나 ‘○○로드맵’이라고 한다. 굳이 영어를 써야 할까? 정부 발표문이나 국회 연설문 같은 것을 보면 몇 번을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텔레비전에 나오는 예능을 보면 이건 우리말을 쓰자는 건지 영어를 쓰자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런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면 바보 취급하기도 한다. 심지어 뉴스에서 기자들이 말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 국민들은 그런 말이 맞는지 알고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따라 쓴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어려운 문장은 판사들이 쓰는 판결문이다. ‘도둑이 무엇을 훔쳤다’ 하면 될 것을 ‘도둑이 무엇을 절취하였다’고 하거나 ‘절취한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대법원 판결문이나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읽어보면 법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도 꼼꼼히 읽어야 이해할 정도다.

또한 우리말에 없는 틀린 말도 많이 쓴다. 서울시청 2018년 10월 8일 보도자료 가운데 “서울도서관, 『서울선언』 : <김시덕 작가와의 만남> 개최”라는 제목이 있다. 여기서 ‘작가와의’에서 ‘의’ 자는 빼야 맞다. 이는 일본말에서 온 것이라 한다.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도 잘못된 제목이라 한다. 여기서도 ‘의’ 자가 잘못 들어가 있다고 한다. ‘감옥 속의 사색’ 또는 ‘감옥에서 얻은 생각’이 맞다고 한다. 얼마 전에 나온 ‘이 별에서의 이별’이란 책도 제목이 잘못되었다. 내가 알기로 이 책은 비싼 수업료를 내고 글 쓰는 법을 배우면서 출간한 책으로 알고 있다. 이 책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이 책 내용은 더없이 좋다.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또 우리가 어렸을 때 듣고 배운 노래 가사 ‘나의 살던 고향은’에서 ‘나의’는 ‘내가’로 바꿔야 한다. 이것은 작사가도 잘못했다고 인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이렇게 부르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일본말에서 들어온 잘못된 말과 외국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다.

 

나도 보고서를 쓸 때 저렇게 쓴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글에 대한 책도 보면서 공부하고 있다.

유시민은 ‘글쓰기 특강’에서 자기가 쓴 글을 소리 내어 읽어 보라고 한다. 만약 소리 내어 읽기 어렵다면, 귀로 듣기에 좋지 않다면, 뜻을 파악하기 어렵다면 잘못 쓴 글이라 한다. 못나고 흉한 글이라고 한다.

『옛날 우리 백성들은 중국글자를 모르면 사람대접을 못 받았고, 왜정 때는 일본말 글자를 모르면 아주 못난 시골사람으로 천대받았다. 그런 잘못된 역사는 아직도 그래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글은 바르게 못 써도 부끄러운 줄 모르면서 영어는 글자 한자 잘못 쓰면 크게 수치스런 일로 아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교육이고 정치고 문화고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오랜 세월 길들여진 종살이본성을 뿌리째 뽑아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걸핏하면 외국손님 보기에 부끄럽다는 식으로 말하는 버릇도 우리가 마치 외국 사람을 위해 살고 있는 것처럼 알고 있는 종살이본성에서 나온 말이다.

외국인을 만났을 때는 당당하게 우리 말로 하자. 그래서 통하지 않으면 그들을 멸시하기까지는 안 해도 좋다. 다만 외국말 모른다고 기가 죽지 말자. 서양말․일본말․중국말 모른다고 기가 죽을 이유가 우리에게 손톱만큼도 없다. 그런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이 글은 이오덕 선생이 『우리 글 바로 쓰기』에서 말한 내용 가운데 일부다. 이오덕 선생에 따르면 웃음을 뜻하는 ‘미소(微笑)’, ‘미소 짓다’도 일본글에서 배운 것이라 한다. 우리가 날마다 쓰는 그리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유명인들 심지어 시인들도 쓰는 ‘미소’가 말이다. 영어 ‘smile’을 알기 훨씬 이전에 일본글 微笑를 배우게 되었고, 『英和辭典』이 ‘smile’을 ‘미소 짓다’로 해놓았으니 『英韓辭典』이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축제(祝祭)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대학축제, 세계불꽃축제, ○○축제 따위가 너무도 많다. ‘축제(祝祭)’에서 축은 축하할 축이고 제는 제사 제이다. 우리나라 제사 문화는 경건하게 조용히 지낸다. 그래서 ‘제’ 자 앞에 ‘축’ 자를 붙일 수가 없다. 그런데 일본사람들 제사는 시끄럽게 떠드는 행사로 지낸다고 한다. 축제란 말을 일본말 사전에서 찾아보면 축하의 제사, 축하와 제사로 풀이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온갖 행사에 이 축제란 말을 붙이고 있다. 우리말에 ‘잔치’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도 말이다. 참 어이없다.

이 미소와 축제의 뜻을 알게 되고 난 뒤부터 라디오 같은 데서 이 단어들을 들을 때마다 짜증이 난다. 그밖에도 이런 잘못된 말들이 엄청 많다.

 

이오덕 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다른 책도 보고 있는데 책을 빨리 읽을 수가 없다. 자꾸 문장들이 눈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책이나 영어권 책을 번역한 것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한 민족의 정신은 말과 글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다른 나라를 쳐들어간 국가는 먼저 그 나라 언어를 말살하려고 했다. 일본도 우리나라를 쳐들어와 한 짓이 창씨개명이었다.

인터넷을 보면 책을 쓰는 카페가 많이 있다. 수업료가 몇 백만 원씩 하는 곳도 많다. 그런 곳 가운데 진짜 우리글을 제대로 알려주는 곳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글이 못난 글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쉬운 우리말로 쓰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쓰기 위해 매일 공부한다.

한글날을 맞아 평소에 품었던 생각을 적어보았다. 글을 쓰면 쓸수록 나 자신이 끝없이 부끄러워져만 간다.

 

내가 말하는 것을 우리만의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만들어주신 세종대왕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근데 왜 컴퓨터 자판은 영어가 왼쪽 위 먼저 나오고 한글은 오른쪽 아래에 놓여 있는 걸까?

#한글날#한글#말과글#글쓰기#외국말#일본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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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K(ecafrekop) 2018-10-11 15:51:15

    잘 봤습니다. 특히 일본말에서 온 '의'자는 정말 조심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나마 다른 외래어는 그냥 낱말만 바꾼 수준이지만 이건 우리말의 뿌리를 흔드는 것 같았거든요. 앞으로 글이나 말을 할 때 제대로 쓰도 애써야겠어요.

    p.s. 키보드 자판은 아무래도 컴퓨터가 서양에서 만든 물건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죠 (헉, 아까 전에도 예상이나 추측이라 쓸 뻔;;).   삭제

    • 유진초이(moojin5403) 2018-10-10 16:47:02

      한글에우수성은이제전세계가다아는사실입니다
      그만큼활용도가넓기때문아닌가합니다
      어느나라든100%모국어를표기하고쓰는나라는없을것같습니다
      활용빈도를주일순있어도말입니다
      아무튼우리한글은정말대단한글자입니다   삭제

      • 달덩이(leopard1004) 2018-10-10 08:18:08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추천드려요ㅎㅎ
        한글이 외국어 표기가 자유러워서 더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도 아무 거리낌 없이 쓰던 외래어를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는것 같습니다 ㅎ   삭제

        • (admin) 2018-10-09 22:49:09

          잘 읽었습니다.   삭제

          • 공중분양(supsok1004) 2018-10-09 21:20:20

            후원 드립니다. 일상생활에서 외국어나 신조어가 차지하는 비율도 너무 많고, 분명 우리나라 작가가 쓴 글인데도 번역체 투성이고...ㅠㅠ 우리말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거 같아요   삭제

            • trueimagine(trueimagine) 2018-10-09 18:26:44

              한글 사랑이 대단하시군요.^^ 언어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국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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