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다툼을 하고 나서 그 사람이 그 일을 이만 잊자고 권해 오는 경우는 그동안 몇 차례 겪어 보았다. 내가 그 일을 이만 잊자고 권하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잊자.’는 기억을 잊자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에 수반된 부정적인 감정들을 그만 잊자는 것이겠다. 앙금을 내려놓자는 것이겠다. 가슴에 박힌 가시들을 뽑자는 것이겠다. 지나간 시간에도 불구하고 지나가지 못한 마음을 이미 지나쳐 보내자는 것이겠다.

   언젠가 TV에서 “이미 다 잊었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약간 멋쩍어 하며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했다. 얼마 전 자신과 싸운 사람에게. 싸움에 관련된 모든 감정을 이만 내려놓았다고 말하며, 그는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그 천천한 눈짓은 그가 확보한 여유를 가장 유려하게 피력하는 일 같았다.

   며칠 전, 그 마음을 겪었다. “이미 다 잊었어.”의 마음을. 처음 있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굳이 그 마음을 말로 바꾸지 않았다. 내가 다 잊었으니 당신도 다 잊으라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이걸 이렇게 다 잊었는데 그 사람은 언제 잊을 것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내 쪽에서 끝난 일은 내 쪽에서 끝난 일일 뿐이고, 그걸로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인간관계에서의 이별 과정이나 화해 과정, 용서 과정, 이해 과정은 결국 두 사람 따로 하는 거라는 생각이 났다. 그게 자연스럽다고.

   이전의 나는 사랑도 완전히 나란히 해야 좋다고 생각하고, 헤어짐도 완전히 나란히 해야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불가능한 일이며 부자연스러운 일임을 최근 들어 조금씩 받아들여 나가고 있다. 여기서 받아들인다는 말은 생활에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머리로만 익숙하던 관념을 실생활 속으로 도입하고 있다.

박다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