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날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중년이나 됨직한 어느 여성이 어린 시절 아버지와 살 때에 격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녀의 아버지는 배추나무를 트럭에 싣고 다니며 파는 야채 장수였다. 어느 날 학교를 파해 집으로 오는 길에  시장 앞을 지나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허름한 옷을 입고 배추와 무를 짊어지고 배달을 하고 있었단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초라한 아버지가 부끄럽게 여겨져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체하며 그냥 비켜서 돌아왔단다. 이제 아버지는 저 세상으로 떠나고 중년으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가 되어 보니 아버지를 못 본 척하며 얼굴을 돌렸던 자신의 행동이 더 사무치게 가슴에 한 이 되었단다.

 울면서 어린 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이 여성의 고백을 들으며 나는 마음 한 가운데 부모에게 잘못한 일들이 마치 오월 따뜻한 햇살 아래 활짝 핀 철쭉처럼 핏빛으로 살아났다. 

 내가 고동할교에 다닐 때였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이 우르르 짝을 지어 남대문 시장으로 달려가곤 했다. 남대문 시장에서는 당시에는 비싼 여러 가지 청바지를 팔고 있었다. 아이들은 청바지를 사러 갔다. 나도 친구와 어울려 청바지를 파는 시장 바닥을 수없이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나는  청바지를 살 수 없었다. 우리 집 형편이 어려워 어머니가 돈을 주지 않았다. 친구를 따라 때로는 동대문 시장까지 따라다니며 푸를색 바탕에 굵은 실로 실밥이 드러나게 바느질한 청바지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나는 시장에서 청바지를 보고 온 밤이면 어머니 곁에 바짝 붙어 앉아 나도 사 달라고 조르곤 햇다. 별 희한한 말로 청바지가 질기고 튼튼해서 한 벌만 가지면 한 겨울을 날 수 있다고 하였지만 어머니는 돈을 꺼내 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리 동네 아이들 중에 청바지를 입지 않은 아이가  나 혼자쯤 되었을 때 나는 차츰 어머니에게 투정이 아니라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졸라대기 시작하였다.  '동네 얘들은 다 입고 다니는데...... ' 하는 말을 붙이기도 했고 ' 얼마나 된다고 그것도 안 사 줘.' 하는 말도 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조금만 참아라.' 하는 말씀만 하셨다. 몹시 비가 오는 어느 날 저녁 때 나는 어머니에게 청바지 이야기를 꺼내고 투덜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날은 유독 아무 말도 없이 내 말을 한참이나 듣고 견디다가 부엌으로 나가셨다. 나는 어머니가 방문을 닫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청바지 그것 몇 푼 한다고!' 하면서 불만에 가득 찬 소리를 지르고 집 밖으로 나왔다. 

 밤이  깊도록 아이들과 놀다가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안에서 잠그지 않은 문이 순순히 열렸다. 이미 집안에는 전등불이 꺼져 있었다. 내 방이 있는 계단을 소리나지 않게 올라가느라고 살금살금 기어가고 있는데 부엌 쪽에서 마치 누가 목이라도 조르는 것처럼 가냘픈 울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내려와 복도를 따라 부엌문 쪽을로 갔다. 문틈으로 부엌 안을 보았지만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다시 숨을 죽인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나는 겁이 나기도 났지만 부엌문을 살짝 밀고 그 틈새로 안을 보았다. 부엌 한가운데 어머니가 혼자 쪼그르리고 앉아 울고 잇었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 몰라 겁이 나서 얼른 이층으로 올라갔다. 내 방에 들어가 이불을 덮고 누워 생각해보아도 어머니가 왜 우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후에도 나는 청바지를 사 달라고 졸랐고 어머니는 기다리라고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속상하다고  쪼르르 밖으로 나갔다가 늦게야 돌아오곤 했다. 내가 밤이 깊어서 들어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항상 부엌에서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무슨 이유 때문에 어머니가 우시는 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청바지 때문에 투덜거리며 밖으로 뛰어나간 나를 기다리며 속상해 울었다는 것을,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알았다. 참으로 어리석기만한 자식이었다. 따뜻한 정이 통하는 가정을 만들어 가고 싶어하는 어버지가 된 다음에야 겨우 어머니의 마음을 알았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가는세월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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