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신은 망신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한 당신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웃었습니다. 당신의 시선은 여전히 내 눈동자 근처에 있었습니다. 나는 내 눈동자에서 멀어지는 당신의 시선을 내 시선으로 쫓으며 당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하는 대신 당신 얼굴을 계속 쳐다보았습니다. 당신의 입술이 다시 웃는 모양이 되었습니다.

   “망신은 망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똑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확신에 찬 말투로.

   “그럼?”

   내가 그렇게 묻자, 당신이 숨을 들이켜며 “나는 망하지 않아.”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망신을 당해도 나는 망하지 않아요. 깎이는 건 체면이나 명예, 평판 같은 거지, 내가 아니니까. 망신이란 단어 뜻이 내가 망한다는 거거든요. 몸이 망한다거나, 내가 망한다거나, 나의 주요한 뭔가가 망한다거나, 그런 뜻인데. 나한테 망신은 그런 일이 아니거든요. 누구한테는 망신당하는 일이 죽는 일처럼 끔찍할 수 있겠지만, 나한테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망신은 망신이 아니라고 한 거예요. 그리고 물어보려고. 당신한테 망신은 망신인지.”

   나에게 질문이 돌아올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해서인지, 나는 조금 당황하며 안경을 고쳐 썼습니다. 나에게 망신은 내가 망하는 일인가. 자존심이라는 단어가 별안간 떠올랐습니다.

   언젠가 누군가는 나더러 ‘자존심 짓밟히면 단 1초도 못 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안 하는 일 참 많은 사람이라고.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체면, 명예, 평판 전부를 목숨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내가 평생 그렇게 살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인생이란 게 요지경이데요. 처음이 어렵지, 버려 버릇해 보니까 버리기가 참 쉽데요, 자존심이란 게. 버려 버릇해 보니까 그게 참 별거 아니데요, 자존심이란 게.

   좋아하는 일이 생기니까 자존심 무릅쓸 일이 지겹게도 많이 생겼고, 그 세월 다 보내고 나니, 나는 그 이전과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디 아쉬운 소리도 해 보고, 거절당할 거 알면서도 뭔가에 도전해 보고, 그러면서 나는 아무리 부끄러운 일을 겪어도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서서히 알게 되었습니다. 뭔가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그 앞에 아무런 조건과 핑계를 내걸 수 없다는 것도.

   뭔가를 정말 사랑해서 그것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마음이 내 안에도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발견하고 그 마음과 나란히 걷는 세월 동안 내가 얼마나 안도했는지. 주변에 세워 둔 벽 다 허물고 한 지점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세월을 나도 살 수 있기를 오래도록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소원 성취의 과정은 내 생각과 너무 달랐습니다. 나는 내가 그 모든 벽을 손수 허물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힘을 들이고 공을 들이면서요. 그런데 그게 아니데요. 무언가를 향한 내 마음이 커질 만큼 커지면, 그것들이 저절로 박살나 버리데요. 어느 순간부터 그것들이 완벽하게 투명해지데요. 나를 가로막지 못하게.

   하여 지금은 나에게도 망신이 망신 아닙니다. 당신에게 이런 대답을 줄 수 있기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망신으로 내 몸과 인생을 망쳐 왔는지 떠올라, 문득 ‘참 먼 길을 왔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망신을 망신으로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오래 생각하게 됩니다. 그 생각이 거듭될수록 용감해지는 나를 만납니다.

박다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