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당신이 문득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고요.”라 말하며 말끝에 한숨을 내쉽니다. 당신 목소리는 작습니다. 내가 당신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당신 손에는 두툼한 책 한 권이 들려 있을 것입니다. 표지가 빨간색인 양장본 책.

   그때까지 우리는 따로 앉아 각자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화요일 자정 무렵입니다. 평범한 화요일 밤입니다. 나는 내가 읽던 책에서 시선을 떼고 당신을 건너다봅니다. 당신은 이미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보다 어두운 곳에 앉아 있는 당신의 눈빛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내 눈이 저절로 가느스름하게 떠집니다. 여전히 당신 얼굴은 진하게 그린 목탄 스케치 같습니다.

   “응?”

   내가 그렇게 반응하자 당신이 희미하게 웃습니다. 빈 찻잔을 찻잔받침에 내려놓는 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내 쪽으로 번져 옵니다. 어쩌면 그것은 웃음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고요?”

   내가 다시 말했습니다. 당신은 미동 없이 나를 계속 쳐다보다가 “응.”이라고 대답합니다. “고요.”

   “그 고요 말하는 거야? 정적, 적막, 고요, 그 고요?”

   내가 묻자 당신이 다시 “응.” 하고 대답합니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이 책에는 이 단어가 한 번도 안 나오는데.”

   “그랬어?”

   그 말을 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읽던 책은 책상 위에 엎어 놓습니다. 내가 당신 쪽으로 다가가자, 당신은 앉은 자세를 고칩니다. 나는 당신이 앉아 있는 소파 밑에 다리를 펴고 앉습니다. 그런 채로 책상 위에 켜져 있는 스탠드 불빛을 올려다봅니다. 노란 불빛이 어디까지 퍼져 있는지 봅니다. 고요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 감정을 일으킵니다.

   “예전에는 말이야. 난 내가 고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만들어야 한다고.”

   내 어깨를 톡톡 치며 당신이 말했습니다. “고요한 삶을 가지고 싶다면, 그걸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야. 되돌아보면 되게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아. 내가 소란한 것들을 내 삶 밖으로 치워 버릴 때, 그 빈 공간에 저절로 고이는 게 고요인데. 그러니까 고요는 허공 같은 건데. 나는 고요가 실체라고 생각하고 그걸 자꾸 만들려고 한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인데, 그땐 그게 왜 그렇게 당연했을까. 비울 줄을 몰라서 그랬던 것 같아.”

   “고요한 삶이 갖고 싶었어?”

   나는 느릿한 말투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 말이 끝나고 1분쯤 지난 때였습니다. 내 등 뒤에서 당신이 숨을 오래 들이쉽니다. “자기는? 자기는 그런 삶 안 갖고 싶었어?”

   “왜 안 갖고 싶었겠어. 내가 얼마나 시끄럽고 어수선하게 살았는데. 근데 하루하루가 너무 야단스럽다 보니까, 고요한 삶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할 틈이 없는 거야. 그렇게 28년을 경황없이 산 다음에 자기를 만났어. 그땐 우리 둘 다 귀가 너무 먹먹해서, 한동안은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못 듣고 지냈잖아. 만나면 손잡고 걷거나 어디 가서 뭐 먹기나 했지. 대화라 할 만한 건 못 나눴어, 그치. 처음에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어. 왜냐면 그때까지는 누구를 만나든 그렇게 만났으니까. 근데 자기 입에서 떨어지는 이야기가 무슨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너무 궁금한 거야. 그 궁금증이 떨쳐지지가 않는 거야. 자기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내 청력 관리를 시작했어.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귀 닫는 법을 연습했어. 그래야 자기한테 가서 자기가 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으니까. 근데 나 지금 이 얘기 왜 하는 거지? 자기 얘기 들으러 왔는데 왜 내가 내 얘길 하고 있어.”

   내가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리자 당신도 “헤.” 하고 웃습니다. “뭐 어때. 그래서 지금은 고요해?”

   “고요했었어. 자기 만나고 몇 년 동안. 근데 몇 년 귀를 쉬게 해 주다 보니까, 귀가 소리를 듣고 싶어 하데. 나한테도 듣고 싶은 소리 같은 게 있더라. 온갖 소음에 파묻혀 지내느라 몰랐는데. 나한테도 그런 게 있었어. 사람이 듣고 싶은 소리만 듣고 살 수는 없지만, 듣고 싶은 소리 틈틈이 골라서 들을 수는 있더라고. 그래서 지금은 안 고요해. 딱 좋을 만큼.”

   “좋네. 무슨 소리가 제일 좋아?”

   당신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사람 소리. 제일 싫었던 게 사람 소리인데, 지금은 사람 소리가 제일 좋아. 내가 싫었던 건, 사람 소리 자체가 아니라, 너무 많은 사람 소리였나 봐. 뭐든 내가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물러서는 연습을 하고 보니까, 세상에 내가 좋아하지 못할 게 없는 거 같더라.”

   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당신이 몸을 일으킵니다. 그러더니 내 옆에 앉아 오른손으로 눈꺼풀을 비빕니다. “다행이다. 우리 둘 다 인생 터져 나가기 전에 인생에다가 배수구 달아서. 필요 없는 것들 차근차근 내보내고. 약간 리모델링하는 기분이네. 나 조용한 데로 자꾸 데리고 다녀 줘서 고마워. 소란한 것들을 어떻게 치워야 하는지 난 몰랐어. 살수록 왜 자꾸 숨이 막히는지 난 진짜로 몰랐어. 그냥 귀 먹먹해진 채로 캑캑거리면서 사는 게 인생인 줄 알았어. 다르게 살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니까, 다른 사람들 인생도 내 인생 같겠거니 싶어 하면서 그냥 살았잖아. 그때 자기하고 휴가 맞춰서, 거기 어디더라, 바닷가 민박집에서 일주일 살았을 때 말이야. 그때가 처음이었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요하게 지내 본 게. 진짜로 나는 그때 귀가 이상하더라. 주변이 너무 조용하니까.”

   “그랬어?”

   “응, 그랬다니까. 휴가 끝나고 집 가는 기차 타자마자 마음이 울렁울렁하더라고. 계속 그렇게 살고 싶어서. 성취감 같은 것도 들더라. 아무것도 안 했는데 뭘 많이 배우고 가는 것 같아서.”

   거기까지 말한 당신이 얼굴을 활짝 펴고 웃습니다. 졸음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당신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집니다.

박다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