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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무야!

과거에 대학을 졸업하고 수차례의 취업낙방 끝에 대기업 비서실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에서는 경사났다고 엄청들 좋아하셨구요.

그런데 활동적인 일을 좋아하던 저에게 비서일은 너무 무료하고 지루한 날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그만 둘 수도 없었구요. 그러니 일을 제대로 못하고 혼나고 마지막 기회라면서 따로 교육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적응하고 주어진 환경에 익숙해져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는 상황들이 보였습니다.

비서실의 조직은 모시는 상사의 직위가 높을수록 서열이 높았습니다. 사장비서가 젤 높고 그 다음으로 부사장 비서, 이사들 중에서 힘없는 이사의 비서가 가장 서열이 낮고요. 비서들 사이에 세력다툼도 많았구요. 사장비서파, 부사장비서파..이런식으로여. 그리고 또 재미있는 게 사장비서는 자기가 사장인줄 알고 이사비서는 자기가 이사인줄 아는, 그런 생각들이 있더라구요.

그들 조직에 물들어가다 보니 저도 점점 안하무인이 되어갔습니다. 과장, 부장 우습게 보이는 거죠. 저는 상무비서였는데 상무 비서도 상무였으니까요. 어떤 과장님이 ‘상무님 오시면 전화해 달랬더니 왜 전화를 안해주냐’하면 ‘문 앞에 앉을뱅이 의자라도 갖다놓고 기다리지 그랬냐’고 거만을 떨었습니다.

그러던 중 모시던 상무님이 어떤 비리에 연루되어 사직을 하게 되셨습니다. 그러면 비서는 다른 부서로 발령이 되면 남는 거고 아니면 같이 그만 둬야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 어떤 부서에서도 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2년여 만에 첫 직장을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조직생활이란 게 적을 만들면 안되는구나’, ‘모두와 어우러져야 하는구나’ 뼈져리게 깨달았죠.

그러다가 아는 언니의 소개로 두 번째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무슨 유망한 벤처기업이라는데 들어본 적도 없고 모든 직원이 한 사무실에 앉아있었습니다. 800여명 다니는 대기업에서 12명, 작은 회사에 들어갔으니 제 자신이 비참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었죠.

그런데 그 회사가 뜨기 시작했습니다. IT, 게임 산업 열풍이 불면서 저희 회사도 급속도로 성장해갔습니다. 작은 회사여서 비서, 홍보, 총무팀일까지 하던 저는 홍보일만 전담하게 되면서 날개를 단 듯 했습니다. 적성에 꼭 맞는 일을 찾게 된 거죠. 기사작성하고 사람 만나고 연예인 불러서 행사하고 출장 다니는 등 일하는 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도 만났습니다. 남편의 사번은 7번, 저는 12번. 거의 초창기 창업 멤버라 회사가 코스닥 상장했을 때 우리사주도 많이 받았습니다. 자신의 주머니만 채우는 그런 사장님이 아니어서 회사에서 대박친 돈들을 직원들에게 입사순서, 기여도 등을 따져서 공평하게 골고루 나눠주셨습니다.

부끄럽고 정말 아픈 기억이지만 첫 직장을 짤린 게 저한테는 잘 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대로 첫직장에 쭉 다녔다면 그런 편협한 사고방식으로 계속 살았을거고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기회도 얻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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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9-05-25 22:12:56

    저랑 반대시네요. 전 첫직장을 옮기지 말고 계속 다녔어야 했는데 ..ㅠㅠ 암튼 전화위복 되셨다니 좋은 경험이셨네요.공무원들이 세상 물정 젤 모른다고 하죠.우물안 개구리는 한군데서 퇴직하는 사람들이라 하는데 우리나라는 이직경험을 마이너스로 생각하는 이상한 곳이죠.   삭제

    • 송이든(widely08) 2019-05-25 18:43:57

      원래 조직이란 곳이 그렇더라구요. 개인전이 아닌게 되더라구요. 그래도 전화위복으로 자신의 기량을 펼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네요.   삭제

      • 알짬e(alzzame) 2019-05-25 13:36:53

        정말로 전화위복이라고 할 만합니다.
        첫번째 직장에서의 실패(실패는 아니지요)가 더 좋은 기회를 가져다 주었네요.
        앞으로도 주~욱 잘 달리시길 바랍니다.   삭제

        • 바라보기(qkfkqhrl) 2019-05-25 12:48:44

          잘 되었습니다.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 언제든 기회가 오는가 봅니다.
          저는 재 격에 맞게 살았던 것 같구요.ㅎㅎ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쭈욱 승승장구 하시실 바랄게요.   삭제

          • 78rang(78rang) 2019-05-25 10:43:46

            ㅋㅋ 군시절때, 신입사원때 생각이 나네요
            사택생활하다보니 와이프가 과장 부장 와이프앞에서 사모님이라며 연방 굽신굽신, 그건 나도 마찬가지,
            결국 1년만에 사택을 떠났지만, 그런 아이러니는 현재도 사회진행형?   삭제

            • crosssam(crosssam) 2019-05-24 14:39:41

              정말 사람은 한치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평생의 인연을 만나셨기에 전 직장을 그만두시게 된게 너무 잘된 거 였네여. 부럽습니다^^   삭제

              • 바람처럼(chang) 2019-05-24 13:37:15

                직장은 월급도 받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며 익히며 성장해 가는 훌륭한
                장소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삭제

                • 짐(musicbob88) 2019-05-24 12:41:32

                  아주 솔직한 얘기 잘 읽었습니다.   삭제

                  • 메이블록(maybugs) 2019-05-24 12:18:26

                    사장 비서면 자기가 사장인줄 알고 이사 비서면 자기가 이사인줄
                    안다는 말씀이 뭔지 알겠네요.^^
                    2번째 회사의 좋은 사장님을 만나셨네요. 이익을 나눌 줄 아는
                    회사대표는 만나기 쉽지 않은데요. 축하 드립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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