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꿈을 꿨어

“그러니까 무슨 꿈? 마음 어수선해지는 꿈이 뭔데?”

당신이 물었다. 당신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다 말고, 왼쪽 눈 밑 살점이 일그러진다. “뭔 꿈을 꿨길래 아침부터 표정이 그 모양이야? 잠도 못 잔 건가? 눈 주변이 시꺼먼데.”

“아, 그냥…….”

내가 그렇게 어물어물하자 당신이 “아휴.” 하며 내 허리를 툭 친다. “안 묻는다, 그럼. 가.”

“뭐야, 토라질 일이야, 이게? 하여튼 말을 아끼질 못해요. 그 사람 꿈 꿨어.”

“누구?”

“그 사람.”

나는 그 대답만 남기고 싱겁게 웃는다. 얼굴 근육들이 아무 방향으로나 움직이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당신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낀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은 두 명인데. 최소 두 명.”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당신도 웃을 듯한 표정을 짓더니 손바닥으로 자신의 팔뚝을 문지른다. “그 사람 왜. 꿈에서 뭘 하던데? 넌 아직도 그 마음 그대로고? 넌 어떻게 된 애가 아직도 이렇게 휘청휘청…….”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뭘 했어.”

내 말을 들은 당신이 주위를 휘둘러본다. “뭐?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얘기하기 그런, 뭐, 그런?”

그렇게 말한 당신이 한숨을 내쉬며 웃는다. “농담.”

“농담이 나오냐. 아깐 나더러 죽상이라더니. 이게 놀리려고 아주…….”

“니가 뭘 했다 그러니까 갑자기 니 얘기 들을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거 같아서.”

“내가 그 정도지?”

내가 묻자, 당신의 고개가 비스듬히 꺾인다. “뭔 그 정도?”

“아니다.”

“뭘 했냐고, 뭘. 날 새겠다. 얘기하기 싫음 마라 그랬지.”

“붙잡았어. 그 사람을. 꿈꾸는 내내. 실제로는 그 사람한테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어. 붙잡을 때도 건성으로나 붙잡아 봤지, 그런 식으로 애달프게 붙잡아 본 적은 없는데. 나는 내 마음에 바늘 자국 하나 안 남기려고, 항상……. 도망갈 구멍 크게 뚫어 놓고, 한쪽 발을 거기다가 걸쳐 놓고 그 사람 만났어. 조금이라도 상처 받을 거 같으면 그쪽으로 얼른 달아날 자세로. 근데 꿈에서는 내가 그 사람을 붙잡고 있더라니까. 붙잡는데, 마음이고 뭐고 너무 아프더라. 아리고 따갑고 난리더라. 명절이었어. 가족들하고 한 자리에 있는데, 내가 자꾸 집 밖으로 나가거나 빈 방으로 가. 그러고는 그 사람한테 전화를 걸거나, 그 사람한테 문자를 보내. 다시 시작해 보자고. 내가 미안하다고. 내가 앞으로는 더 잘할 거라고 약속도 하면서. 근데 그 사람이 싫대. 너무 단호해. 너무 단호해서 내 마음이 자꾸만 내려앉더라.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돼. 눈앞에 아무것도 안 보여. 가족들이 왜 정신 딴 데 두고 있냐고 나한테 뭐라고 하는데, 그 말들이 귓속으로 안 들어와. 머릿속에 그 사람 말밖에 안 들어 있어. 싫다. 난 너랑 다시 못 만나겠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지내라. 진심이다. 그런 말들. 진짜 마음 정리 다 된 사람이나 꺼낼 수 있는 무덤덤한 말들. 현실에서는 내가 늘 하던 말들. 그 말들이 그런 말들이었구나. 사람 순식간에 무너지게 하고 주저앉게 하는 말들이었구나. 그 사람은 늘 그랬겠지. 내가 그 사람한테 헤어지자고 했던 순간마다. 내가 절반 이하의 마음만 줘도 자기는 온 마음으로 나를 좋아해서, 그 사람은 매번 절박하게 나를 붙잡고……. 나는 툭하면 진심도 아니면서…….”

“야, 5년도 더 지난 일이야. 몇 번을 더 말해 줄까. 5년도 더 지난 일이야. 후하게 치면 10년 전 일이라고. 그리고 너는 그때 걔 아니야. 너 그때 걔 아니라고. 이런 얘기 나올 때마다 왜 자꾸 너를 그때 걔 취급해? 그때 걔처럼 계속 살고 싶어? 그러길 원해? 아니잖아. 너무 아니잖아. 너 걔 너무 싫어하잖아. 그래서 기를 쓰고 다 고쳤잖아. 뭐, 다는 아닐지 몰라도 거의 다 고쳤잖아.”

내 손목을 붙들며 당신이 말했다. “몇 년을 더 이렇게 살아야, 니가 벌 다 받았다고 생각할까. 니가 항상 말하지. 넌 벌 받아야 한다고. 그 사람한테 상처 준 만큼 벌 받아야 한다고.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해도,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해도, 넌 내 말 한 번을 안 믿었지. 오늘도 너, 니 자신한테 벌주는 거야. 꿈 그거, 그냥 꿈일 뿐인데, 여기까지 그거 가지고 와서 너 찌르고 패고……. 니가 지금 니 과거 때문에 괴로워? 니가 너 그냥 괴롭히는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이 바라는 게 이런 거겠어? 그 사람, 지금 니 생사조차 안 궁금해할 거다. 아니면, 뭐, 그 사람이 너 원망하니까, 니가 그 사람 대신 너 괴롭혀? 그 사람이 너 원망하는지 안 원망하는지 니가 어떻게 알아? 전부 핑계 아니야? 그 사람이 너 원망하는 게 아니라, 니가 너 원망하는 거야. 아니야? 그리고 그 사람이 진짜로 너 원망하는 거라면, 니가 너를 계속 괴롭혀야 되는 거야? 그게 무슨 논리야? 남이 자기를 원망하는 만큼 자기가 자기를 괴롭혀야 되는 거면, 이 세상에 제정신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내가 그렇게 행동하면 너 가만있어? 아니잖아? 니가 그 사람 문제로 마음 엎었다 뒤집었다 할 때 내가 왜 가만있어? 그 사람 문제로 내가 너한테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거, 너 빨리 나한테 오라고 재촉하는 거 같아서 그런다. 니 눈 가리고 귀 닫게 해서 빨리 내 옆에 오게 꼬드기는 거 같아서 그런다. 너 위하는 게 아니라 나 위해서 지껄이는 소리로만 들릴까 봐 그래. 내가 그 사람 관련해서 말하는 게 전부 니 귀에는 그런 식으로밖에 안 들릴 거 같아서. 그래서 내가 그런 쪽으로는 그동안 입도 안 뗐어. 근데 요즘에는 좀 답답하다. 우리 관계가 답답한 게 아니라, 니가 답답해. 너 니 인생 언제 살 건데? 나한테도 죄 지은 것 같은 얼굴 그만해. 누가 나한테 오래? 내가 너한테 그런 말한 적 한 번이라도 있어? 내가 어떨 거라는 니 생각에 치여서, 너 내 앞에 있을 때마다 쩔쩔매. 그래, 니 생각, 중요하지. 니 인생에서 니 생각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 근데 그게 100% 사실은 아니잖아. 우리 사이에서 모르겠다 싶은 게 있으면 나한테 확인을 해. 맨날 혼자 지레짐작하고 혼자 고민하다가 나한테서 한 걸음씩 물러서지 말고. 그게 진짜 날 위한 일인 거 같아? 지금 내가 원하는 게 뭔데? 너 잘 챙기라고, 너. 나 잘 챙겨 달라고 한 적 없어, 난. 나한테 오기 싫음 오지 마. 누가 그런 걸로 안달해? 니가 내 옆에 와야 내 사랑이 마침내 완성되고 뭐 그런 거냐? 아니? 근데 나 왜 화내고 있지? 아휴. 모르겠다. 니가 어련히 잘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 번씩 너 얼굴 이렇게 상해 가지고…….”

“미안. 괜한 말을 했다.”

“뭘. 내가 캐물었지. 가 봐.”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는 당신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니 말 다 맞아. 내가 또 휘청휘청했네. 니 말 들으니까 정신 번쩍 든다. 화내지 마. 나도 내 나름으로는 개선을 조금씩 해 나가고 있어. 못 믿음 할 수 없지만.”

“믿어. 이거 마시고 잠이나 깨. 졸다가 혼나지 말고. 그리고 너 내일 발표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당신이 캔 커피를 건네주었다.

“그러네. 잘 마실게.”

“준비했지?”

“발표? 80% 정도는?”

“오늘 야근하겠네, 그럼.”

“그래야지. 집에 가면 잘 거 같아서.”

“도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