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 그 뜨거웠던 거리응원

거리로 뛰어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붉은 악마 티를 사고, 붉은 악마 뿔 머리띠를 사고, 얼굴에 태극 마크를 그리고 내 아이들과 그 역사적인 순간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나름 딸만 가진 엄마였다. 아이들의 패션에도 신경써야 했다. 밋밋한 붉은 악마 티를 잘라 배꼽 티처럼 만들어 입고, 태극기 머플러를 손목에 묶고, 막내 손에 요술봉을 쥐어주고, 커플티라면 질색하던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가족 커플티를 맞추어 입고 행복해 했다. 서로 각자의 취향대로 티를 수선해서 패션 선두주자처럼 걸치고 응원도구들을 챙겨 거리로 몰려나갔다.

드디어 이탈리아와의 16강전 경기.

경기 초반 페널티킥을 얻은 대한민국. 킥커는 안정환, 이때 얼마나 가슴을 조렸는지 모른다.

이을용에 이어 안정환마저 득점 찬스를 놓치고 만다. 안정환의 안쓰러운 표정이 스크린에 가득 담기는데, 그 선수의 자책과 실망감이 얼마나 클지 다 전달되어 오는 느낌이었다.

거리 응원단들이 다 같은 마음이었는지 괜찮아! 괜찮아!를 외친다. 이 따뜻한 마음이 경기장에 전달되었으면 했다.

이날 비에리 선수가 굉장히 얄미웠다. 김태영 선수를 팔꿈치로 가격했다. 주심마저 공정해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탈리아 비에리선수가 골을 넣으며 앞서 나갔다. 안타까웠지만 아직 시간은 많다.거친 태클들이 우리 선수들을 힘들게 한 경기였다. 부상당한 선수들이 속출했다. 히딩크는 부상 선수들을 빼고 황선홍, 이천수, 차두리를 투입시켰다. 공격수를 대거 투입해 이탈리아를 몰아부쳤다. 붉은 악마들의 응원도 더욱 거세졌다. 결국 설기현이 극적인 동점골을 만들어냈다.

경기장 안 붉은 악마들의 환호성과 거리 곳곳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에 유럽강호들도 흔들렸을 것이다.

붉은 악마가 13번째 선수가 되어 뛴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선수들도 느꼈을 것이다. 연장전까지 가는 열차에 모두가 올랐다. 그리고 연장 후반 안정환의 골든골이 터졌다.

2 -1로 강호 이탈리아를 무너트리고 대한민국이 역전승했다.

오 마이 갓~ 8강 진출의 역사를 썼다. 고작 일본이 아닌 유럽 강호들을 무릎 꿇게 했다. 우리가.

갈수록 태산이라. 8강에서는 스페인이다.

16강 때보다 더 요란하게 응원도구들을 하고 시청 앞 광장으로 몰려갔다. 길거리마다 지나가는 자동차가 클렉션으로 '대한민국' 소리를 눌러댔고,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사람끼리 마치 아는 사람인냥 '대한민국'을 외치며 인사하고 다녔다.

축구가 온 국민을 단합시켰으며 우리가 이토록 뜨거운 피가 흐르는 민족임을 일깨워주었다. 아무리 걸어도 다리 아프다는 소리도 안하고 어린 딸들은 연신 신나 마술봉을 휘두르고 박수를 쳤다.

'오 필승 코리아~'가 '대한민국 만세'보다 더 뜨거운 함성으로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서로 부딪치고 엉켜도 모두가 너그러웠다. 다들 기쁨을 넘치게 나누고 있었다.

난 솔직히 8강전이 가장 힘들었다. 선수들이 느꼈을 부담감이 가장 컸던 경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진짜 심장이 아마 다 쪼그라 들어 남아 있을지 걱정되었던 경기였다. 연장 전.후반을 치르고도 점수를 내지 못했다. 결국 승부차기까지 갔다.

승부차기까지 가지 않기를 너무 간절하게 바랬다.

잘 싸운 선수들이기에 개인적으로 받을 심리적 압박감을 그들이 감수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럼에도 결국 가고 말았다.

오직 골키퍼와 5명의 선수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선수들도 힘들었겠지만 지켜보는 나 역시 손바닥에서 땀이 나기는 처음이었다.

거기다 앞 경기에서 두 번 맞이한 페널티킥에서 이을용과 안정환이 성공하지 못한 장면이 내 뇌리를 너무 치고 들어왔다.

선수 한 명 한 명 나올 때마다 나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 환호성이 들려야만 나는 눈을 뜨고 상황을 즐겼다.

이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데도 승부차기할 때 만큼은 정말 주위가 조용했다.

골이 들어가고 나서야 참았던 모든 숨과 고함을 세 배로 발사했다. 고막이 얼얼할 정도로 말이다.

스페인 호아킨 선수의 골을 이운재가 막아냈다. 상대 선수였지만 안쓰러울정도로 표정에 비참함이 묻어있었다.

그러나 나는 환호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니까. 우리에게 승리의 고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홍명보가 골을 넣으면서 드디어 4강진출! 확정.

모르는 사람인데도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공중으로 방방 뛰어 올랐다. 이미 목도 맛이 갔는지 굵직굵직 쇠긋는 소리가 났다. 상관없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가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모두 수고했다. 모두 너무 너무 애썼다. 눈물이 났다. 그동안 선수들의 체력도 걱정되었고 그들이 받았을 압박감에 안쓰러웠는데 '이제 됐다' 하는 마음과 함께 내 다리도 힘이 풀렸다.

일본 보고 있나? 우리가 유럽강호들을 다 무너트리고 4강에 진출했다. 이제 한.일전을 시시해서 어떻게 보지? 이제 일본은 우리 상대가 아니라는 자만심이 솟아 올랐다.

가장 뜨거웠던 순간이었다. 내 일생을 통틀어 이렇게 환호하고 외쳐보기는 처음이었다. 이 많은 인파속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끌어안고도 전혀 어색함 없이, 같은 국민으로서 즐거워할 수 있는 날이 또 올 수 있을까.

선수들도 너무 잘했지만 국민들의 거리 응원을 보면서, 붉게 물든 광화문 광장을 스크린으로 보면서 얼마나 벅차 올랐는지 모른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이 엄청나게 솟구쳤다. 이렇게 뜨거운 국민이었구나. 이처럼 축구 하나로도 똘똘 뭉치는 국민이었구나. 멋지다. 대한민국.

우리의 4강진출도 놀랍지만 세계가 우리의 응원에 감탄하고 있었다. 붉게 물든 대한민국 거리가 전세계에 보도되고 있었다.

솔직히 4강 독일과의 경기는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다. 난 이미 스페인 경기만으로도 우리 선수들이 너무 너무 자랑스러웠으니까. 독일에게 져서 아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워낙 막강한 유럽강호들과 경기들을 치뤄오느라 그들의 체력이 얼마나 소진되었을지 알고 있었으니까. 여기까지 달려와 준 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했다.

참 뜨거운 여름이었다.

아직까지 내 생애 가장 뜨거웠던 여름을 말하라고 하면 단연 2002년 월드컵이다.

그 역사적인 순간에 우리가 있었다. 다시 한번 그 뜨거운 여름을 맞이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다.

송이든

#8강 #4강 진출 #이탈리아 #스페인 #붉은 악마 #거리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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