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몇 차례, 침묵에 대한 내 태도는 바뀌었습니다. 최초에 나는 침묵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저, 인간의 말하기 능력을 구성하는 한 가지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생각할 뿐이었어요. 그건 어떤 거라는 식의 판단이 개입되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침묵은 침묵이다.’의 세월.

 

내 침묵을 메우는 내면의 소리들을 감지할 수 있게 된 때부터, 나에게 침묵은 일종의 사고 과정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알았습니다. 나는 입을 오래 쉴 수 있는 인간이긴 해도, 생각하기를 오래 쉴 수 있는 인간은 아니라는 점을요. 입이 다물어져도 여전히 벌어져 있는 생각의 주머니에서, 수많은 소리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나는 느꼈습니다. 침묵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었습니다. 외면의 소리들만 적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그것이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내가 침묵할 때 하는 생각과 남들이 침묵할 때 하는 생각이 대충 비슷할 거라고 나는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 잠시 쉬어 가는 건데, 거기서 각자가 다른 생각을 해 봐야 얼마나 다른 생각을 하겠느냐고.

 

언젠가, 각자 침묵이 품고 있던 내용들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그날의 그 사람 침묵을 채우는 문장들은 뭐였고, 그날의 내 침묵을 채우는 문장들은 뭐였고…. 두 사람 사이로 펼쳐졌던 여러 종류의 이야기들이 각자의 마음과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했는지에 관해 숨김없이 폭로한 순간. 그 두 가지 상호작용은 차라리 종이 다른 생물들 같았습니다.

 

그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이 사람 마음과 내 마음이 무섭도록 잘 맞아서, 어쩌면 이 사람이 내 영혼의 반쪽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해도, 이 사람의 침묵과 내 침묵은 구조가 완전히 다른 것들일 수 있다는 걸요. 똑같은 것을 두고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해도, 거기에 대한 세부 견해는 완벽하게 엇갈릴 수 있는 것이 두 사람 마음이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한 가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상대에게 상대의 침묵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해 질문해도 될까. 아니면 상대의 침묵을 통째로 보존해 줘야 하는 걸까. 좋아하는 사람을 더 잘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상대의 침묵 안쪽까지 엿보려고 했고, 좋아하는 사람을 더 존중하고 배려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상대의 사생활을 되도록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내 마음 안에서 둘로 나누어진 세력은 꽤 긴 시간 동안 대치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두드러지게 우세하는 쪽이 없어, 나는 그 고민을 품고 있기만 했습니다.

 

“방금 무슨 생각했어?”라는 말은 별거 아닌 물음 같으면서도 명백한 무신경함으로 느껴졌습니다. 상대의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구나 알아도 되는 일이라고 함부로 판단해 버리는 무신경함. 누구에게나 혼자 간직하고 싶은 뭔가가 있는데…. 상대가 나와 만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의 비밀까지 내 소유로 생각한다는 (그래서 내 마음대로 들춰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무신경함.

 

그 긴 고민 끝에 실세를 장악한 것은 “묻지 말자.”라는 목소리를 내는 마음이었습니다. 상대의 침묵에 관해서는 묻지 않는 게 좋다고 여기는 마음. 상대가 굳이 꺼내 놓지 않는 주제를 먼저 건드리는 건 좋지 않다고 여기는 마음. 본인이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고 싶은 만큼 말하도록, 상대의 발언을 고스란히 존중하자는 마음.

 

 

 

 

“항상 매뉴얼이 있네요?”

 

당신이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 검지 손톱으로 자신의 눈꼬리를 긁었습니다. 당신 손톱이 어떤 박자에 맞춰 움직이는 모습을 관찰하던 나를 먼 풍경 보듯 하던 당신이 고개를 갸웃하며 “항상 그래.”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저런 상황에서는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그런 매뉴얼을 일일이 만들어 준 건가? 당신한테 뭐 물어볼 때마다 답이 딱딱 나오니까 신기하고 대단하면서도 좀, 나는, 갑갑해요. 나는 답을 원하는 게 아니니까. 내가 진짜 알고 싶은 건 이상적인 대답이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신한테 원칙 없이 행동하라고 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럴 자격도 없고. 한편으로는 그 원칙들이 만들어 주는 안정감 같은 게 좋기도 한데요. 한 번씩 그래요, 한 번씩. 갑갑해지는 거. 당신이 어떤 선을 두 겹 세 겹 그어 놓고 ‘여기까지만 오세요.’라고 하는 거 같아서. 통제된 상황에서만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뭐, 내가 난장판이나 아비규환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요. 아무튼 그래요. 어떤 원칙 같은 거에 부딪칠 때마다 당신 얼굴이 어떻게 굳어지는지 나는 아는데, 당신은 모르죠? 되게 묘한 얼굴인데. 주의 깊게 보고 있지 않으면 놓치고 마는 그런 잠깐의 경직이 있어요.”

 

사실 당신 말을 듣자마자 내 머릿속으로 ‘이 사람이 원하는 게 뭐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내 정교한 매뉴얼이 갑갑한 한편으로 좋다고 하는 사람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그런 쪽으로는 매뉴얼이 작성된 적 없어서, 나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내가 무의식중에 내 입술을 말아 물고 미간을 좁히자, 당신은 나에게 당신의 두 손바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거 봐, 새로운 매뉴얼 작성하는 얼굴이네. 근데 잠깐만요.”

 

“네?”

 

“이럴 때 이래야 한다, 뭐 그런 거 속으로 만들기 전에, 나한테는 한 번 물어보면 안 돼요? 이럴 때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떠냐, 하고 나한테 물어봐 주면 안 돼요? 똑같은 상황이 와도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르면, 나는 내 매뉴얼을 살피는 게 아니라 임기응변을 발휘하거든요. 왜냐면, 사람마다 원하는 게 다르잖아요. 어떤 상황이 생길 때 나는 거기에 연결돼 있는 인간관계의 특이성 같은 걸 들여다보는데, 당신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을 꺼내거나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요. 이게 우리의 가장 큰 차이인데…. 그런 당신이 싫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요. 그런 당신을 바꾸고 싶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요. 나한테는 새로운 매뉴얼을 적용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이 사람에 관한 매뉴얼을 만들 때는 이 사람과 논의하자, 라는 매뉴얼을 새로 만들 수는 없겠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말해 주고 싶어요? 당신이 가만히 있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가 물어봤으면 좋겠어요? 왜요?”

 

당신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내가 “왜요?”라고 물었다는 자각이 일어났다. “아니, 그게….”

 

5분 전, 당신은 “내가 좀 전에 무슨 생각했는지 안 궁금해요?”라고 물었고(우리 사이의 침묵을 깬 첫 마디였다), 나는 “안 궁금해요.”라고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들은 당신은 자신의 아랫배 위로 헐거운 팔짱을 끼며 “진짜 안 궁금한 거예요, 아니면, 안 궁금해하기로 한 거예요.” 하고 물었고, 나는 “후자요.” 하고 대답했다.

 

 

 

 

“물어도 괜찮아요. 그게 뭐든, 나한테는 물어도 괜찮다구요. 어디 실물 매뉴얼은 없나? 이 말 받아 적어도 되는데. 당신이 금기라고 생각하는 건 당신만의 금기라는 생각, 그런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우리 사이에 있었던 침묵이 끝날 때마다 당신이 새로운 대화 주제 찾으려고 너무 애쓰는 게 보여서,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내가 좀 전에 무슨 생각했는지 안 궁금하냐고. 그게 정말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내 침묵이 끝난 후에 태연할 거라고 난 생각해서. 그걸 궁금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 침묵이 끝나는 즉시 거기에서 달아난다고 생각하고. 매번 당신은 내 침묵이 끝나는 지점에서 전력 질주를 해요. 내 침묵이 무슨 방사능 오염물이라도 되는 거처럼. 내가 다시 말하기 시작한 때부터, 당신은 허겁지겁 이 얘기 꺼냈다가 저 얘기 꺼냈다가…. 넘겨짚은 거라면 미안한데, 사실 넘겨짚은 거 아니잖아요. 한두 번이 아니잖아.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도 돼요. 아니면, 내가 지금 이게 궁금한데 혹시 이거 물어봐도 되냐고 물어보면 되잖아요. 내가 당신한테 말해 줄 수 있는 건 말해 줄게요. 말하고 싶지 않은 건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해요. 내 몫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하게 해 줄래요? 배려가 너무 먼 곳까지 왔잖아, 지금. 이런 건 침해라고 생각하지 않죠? 당신은 온갖 것들을 미리부터 예상하고 움직이려고 하는데, 그러지 않아도 돼요. 마음이 그렇게 바쁜데 나는 제대로 보여요? 그리고 이게 제일 중요한 얘긴데…. 우리 관계에 대한 매뉴얼을 왜 당신 혼자 만들어요? 내 앞에서 이래야 옳고 저래야 옳다는 판단은 어디에서 온 거지? 당신 추측으로 만든 우리 관계 매뉴얼 때문에 내가 당신한테서 멀어지면, 당신은 뭘 수정할 거예요? 매뉴얼 운영 방침? 아니면 매뉴얼 내용? 나는 매뉴얼 내용 한두 가지 때문에 당신한테서 멀어지는 게 아닌데, 당신이 그걸 모르면, 당신은 매뉴얼 내용 중에 뭐가 잘못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이런 얘기한 사람 여태 한 명도 없었어요?”

 

“네.”

 

내가 즉각 대답하자 당신은 “아이고…. 이 사람을 어떡하면 좋아.” 하더니 힘없이 웃었습니다.

 

“누구한테든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요. 내 나름으로는 경계를 잘 만들어 보려고 한 건데.”

 

내 말을 들은 당신이 아까보다 크게 웃으며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렸습니다. 목덜미가 뻐근한 모양이었습니다. 이것도 내 착각에 지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고개를 오른쪽으로 90도 가까이 기울인 채로 당신은 내 손목을 톡톡 건드렸습니다. “누가 나한테 고의로 실수하래요? 뭐가 진짜 실수인지 아닌지 나한테 확인해 달라구요. 혼자 백날 생각해 봐야, 뭐가 이 사람 기분 상하게 하는 건지 난 모르겠던데. 당신은 알겠어요? 같이하자구요. 매뉴얼 만들기. 매뉴얼 만들어야 사는 사람한테 매뉴얼 버리라고 안 해요. 당신은 당신의 최선으로, 나는 내 최선으로, 잘 꾸려 나가 보자구요. 우리 관계를.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 사생활 관리를 그렇게 광범위하게 하지 않아요. 침묵의 내용 정도 묻는 걸로 사생활 침해당했다고 생각 안 해요. 당신이 절대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누군가는 당신을 기다려요. 그런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네.”

 

내 대답을 들은 당신이 이번에는 웃지 않고 내 손목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습니다. 당신의 손바닥보다 손끝이 더 차가웠습니다.

 

“내가 참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당신이 이리로 올 줄 알았는데, 너무 안 오잖아. 이건 내 매뉴얼인가….”

 

혼잣말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말을 한 당신이 내 손목을 살짝 움켜쥐고 웃었습니다.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요. 이것저것 물어보는 거 난 싫은데, 싶으면, 싫다고 해도 돼요.”

 

“싫지 않아요. 묻고 싶었어요. 물으면 안 된다고만 생각했지. 묻고 싶었어요. 아까 무슨 생각했는지. 그날 문자 내용을 왜 쓰다가 말았는지, 쓰다가 만 문자를 왜 나한테 전송했는지. 그런 거….”

 

“무슨 문자요?”

 

“아…. 왜, 그날이요.”

 

내가 말끝에 앉음새를 고치고 당신을 정면으로 바라보자 당신이 “이게 진짜 얼굴이죠?” 했다. “얼굴에서 물음표 비가 아주 쏟아지네. 내가 너무 보고 싶었던 얼굴인데. 이제야 오네, 이쪽으로. 기다려선 안 되는 거였네. 이 사람, 오라 해야 오는 사람이네. 내 매뉴얼도 수정할게요.”

 

“네, 그러니까 그날이요…. 올 4월인데,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 나는데…. 당신이 새벽 3시에 문자했잖아요. 자다가 방금 깼다고 시작하는 문자, 기억이 안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