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눈치 같은 거 살피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당신이 콧등을 한 차례 찡그렸다. 불쾌함을 드러내는 표정은 아닌 것 같았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당신이 숨을 내쉬며 조금 웃는다. 자세히 보아야 그게 웃음이란 걸 알 수 있지만, 그것은 웃음이었다. 당신 얼굴에 진눈깨비처럼 내려앉았던 웃음이 곧 사라진다. “눈치도 생존 방책의 일부니까. 생존이 급한 문제가 아닌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 가질 필요가 없죠. 굳이. 취미 정도로 그런 쪽에 관심 가진다면 모를까. 나 같은 사람들은 뭘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니까, 이 바닥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당신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매끈한 그 손바닥 위에 뭘 얹어 보는지 나는 확인할 수 없다. 당신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 얹어 놓은 (물론 그 손바닥 위에 실제로 얹혀 있는 건 없다) 물체의 정확한 무게를 가늠하려는 사람처럼 상당히 신중한 태도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당신이 느린 눈짓으로 나를 바라본다. “눈치를 키우죠. 나 같은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 같은 사람들은, 이라고 말하는 게 이제는 애석한 일이 아니에요. 어쨌거나 나는 내가 내 나름으로 단련한 눈치에 의지해서 여기까지 잘 살아왔어요. 뭐, 기쁜 일이라고 생각해요. 감사할 일. 근데 신분증 어딘가에 카멜레온이라고 적혀 있는 거 같을 때가 있어요. 내가 눈치로 살핀 분위기에 따라 내 속성이 완벽하게 바뀌는 것 같을 때마다. 이런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만요. 그 능력이 나를 점점 쾌적한 곳으로 데리고 갔지만요. 가끔은 진짜 내 피부 색깔이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어요. 진짜 내 색깔이라는 거, 내가 사회에서 오래 떠나 있으면 드러날까, 싶기도 하고. 모르죠, 뭐.”

“모르죠.”

내가 그렇게 말하고 테이블 아래를 내려다보자, 당신이 “하.” 하는 짧은 소릴 내며 웃더니 검지 손톱 윗부분으로 찻잔을 통통 두드린다. 알까기를 하는 듯한 손동작이다. “에이, 심각해지지 말고. 네? 자기 인생 두고 심각해지자면 한도 끝도 없어요. 그렇잖아요. 구멍 없는 인생이 어디 있어. 근데 그 구멍들 전부, 바닥이 없어요. 그래서 위험해요. 모든 구멍이 위험해. 제대로 빠지면 빠져 나오기가 힘드니까. 그러니까 자기 인생 두고 농담할 수 있는 넉살이 좀 필요하다, 이거예요. 다들 자기 결핍 안고 살아가는데, 내 결핍이 남들이 가진 결핍보다 대단할 리가 없어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내 결핍이 왕좌에 앉으면 나는 그것의 하인이 돼야 해. 음, 그건 별로 좋은 결말이 아닌 거 같아서. 나는 내가 내 결핍을 부리는 쪽이 좋아요. 부리는 방법은 많겠지만, 나는 내 결핍을 원동력 삼는 과정이 좋아요. 뭔가 굳세게 이겨 내는 느낌이 들어서. 지지 않는다, 라는 체감이 와요. 그건 사실 쾌락에 가까운 쾌감이에요.”

당신은 말을 멈추고 오래 숨을 고른다. 낙타처럼 생긴 동물을 끌고 가는 공원 직원들이 창 너머에서 우리를 힐끔거린다. 공원 어딘가에 동물원이 있는 건가. 낙타(와 닮은 동물)를 데리고 가던 사람들은 갈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이 근처에 업체가 있는 모양이다. 동물들을 다루는.

방금 창밖에 나타났던 동물은 낙타가 아니라 당나귀인지도 모른다. 동물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저번에는 나무늘보를 오랑우탄이라고 했다가 2년쯤 놀림을 받았다. 내 무지 때문에 생긴 일로는 크게 무안해하는 편이 아니라, 놀리는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웃긴 했지만. 나무늘보와 오랑우탄이 거의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기초적인 동물 공부를 좀 해야 하나, 싶긴 했다. 상식선에서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랄까. 내 눈에는 낙타와 당나귀가 구분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낙타와 당나귀는 사람과 사마귀만큼의 차이를 보유하고 있는 동물들일 수 있다.

낙타 등에 뭐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거 같은데 그게 정확히 어떤 모양인지 나는 모르고, 아까 창밖에서 느릿느릿 걷던 그 동물 등에는 안장이 씌워져 있었으니…. 글쎄, 잘 모르겠다. 관심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해서는 철저히 무신경한 내 성격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 중 일부를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았다. 내 성격의 특이점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내가 좋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 내 호감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런 쪽으로 강력한 근성이 없어서, 나 싫다고 하는 사람을 끈질기게 좋아할 수는 없다. 랠리가 이어지지 않는 탁구 경기에서는 일찌감치 기권을 선언한다.

“당나귀 타 본 적 있으세요?”

창밖에서 먼저 시선을 거둔 당신이 연잎 마들렌을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도 나도 아직 손대지 않은 그것을 나도 바라본다. 아까 그 동물은 낙타가 아니라 당나귀구나. 나는 낙타와 당나귀의 차이점에 대해 물어보지 않기로 조용히 결심한다. “아니요, 없습니다. 말을 타 본 적은 있습니다. 승마 체험장 같은 곳에서 잠깐. 3분에서 5분 정도요. 별로 좋은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왜요?”

엄지와 검지로 든 마들렌을 한 입 크게 베어 문 당신이 우물거리며 물었다.

“당사자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는 일을 할 때마다 저는 일종의 불편함을 느껴서. 말 주인이 허락을 했다 해도, 내가 비용을 지불했다 해도, 말의 의사를 알 길은 없지 않습니까. 어쩌면 말은 사람들 태우는 일을 너무 원치 않을지도 모르죠. 피곤할 수도 있고, 아니, 당연히 피곤할 거고. 말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자유 없이 끌려 다닌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물원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실 안 가요. 내 발로는요. 그땐 단체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어서, 나는 일행들과 말을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행 비용에 승마 비용이 이미 포함돼 있었구요. 사실은 조금 흥미가 있기도 했습니다. 말을 타면 어떤 기분일까…. 그래도 불편하긴 불편했어요. 그 불편함을 구성하는 감정 대부분은 미안함이었습니다. 인간의 지능을 이런 식으로밖에 활용하지 않는다는 데 대한 미안함. 물론 그런 말을 어디 대놓고 하진 않았습니다. 승마 체험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의 삶을 비하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냥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내 말을 다 들은 당신이 찌그러진 달 모양의 마들렌을 나에게 넘겨준다. 나는 그것을 받아 당신처럼 크게 한 입 베어 문다. 노란색과 갈색을 벗어난 색깔을 가진 빵을 먹을 때마다 흠칫하는 습관이 있는데 (어쩐지 빵 맛이 아닌 다른 맛이 날 것만 같아서) 이번에도 그런 주저함이 잠깐 있었다. 마들렌에서는 ‘초록색 맛’이 나지 않았다. 다행히. 연잎 맛이 나는 줄도 잘 모르겠다. 그냥 마들렌 맛이다. 버터 풍미가 진하게 나는.

“동물 키운 적, 없어요?”

기름 묻은 손을 닦을 걸 찾는지, 테이블을 한 번 훑어보며 당신이 물었다.

“있습니다. 어렸을 때.”

“마음의 짐인가요? 그 경험이.”

“네.”

내 대답을 들은 당신이 아까처럼 “하.” 하고 웃더니 찻잔 아래 깔려 있던 티슈로 자신의 손가락을 꼼꼼하게 닦는다. “인간의 능력이 인간의 욕심으로 이어질 때도 인간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어디에서 그런 질문을 받은 적 있어요.”

그러더니 당신은 대답을 구하는 얼굴로 나를 건너다본다.

“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점잖게 내 생각을 물은 당신은 새빨간 찻잔을 들고 다시 창밖을 바라본다. 창밖으로 푸른 연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제가 함부로 판단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동물들의 복지를 지극히 생각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본질적으로는…. 본질적으로는 모두가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해서.”

“나머지는 지엽적인 거다?”

찻잔에서 살짝 입을 뗀 당신이 말했다.

“네, 지엽적이지만, 그런 것들도 분명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인간의 본질과 인간의 성격이 동일하지는 않다고 저는 가정합니다. 인간의 본질이란 건 영적인 개념이고, 인간의 성격은 다분히 현실적인 개념이죠. 사실 저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어렴풋이 그렇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우리 모두는 좋은 영혼을 타고났다고 생각하지만, 모두가 거기에 따라 사는 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본질은 본질이고 본질을 활용하는 방식이 성격인 겁니다. 말이 어지럽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요, 이해가 돼요. 전부는 아니지만, 얼추.”

당신이 말끝에 찻잔을 내려놓는다. “이런 면이 있었네. 진중한 사람이라고는 한 번씩 생각했지만.”

당신의 말이 혼잣말 같아서, 나는 손에 남은 마들렌을 마저 입에 넣고 씹는다. 내 입속에서 마들렌이 세 조각쯤으로 부수어졌을 때, 중국인 관광객들이 카페 안으로 우르르 들어온다. 오늘 비 내린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새파란 우비를 입고 있는 사람이 깃발 꽂힌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숨을 몰아쉬며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박다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