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린 너무 어렸다고 하며, 그날 당신은 영정 사진 보듯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바라본 내 눈동자 안에는 ‘사망 이전의 (어쩌면 직전의) 우리 관계’가 들어 있었을까. 시꺼먼 카메라 렌즈를 향해 애써 웃음 지어 보이는 노인처럼, 끝을 앞둔 채 끝나지 않은 시간 쪽으로 고개 돌리고 억지 미소 짓는 사람들이 내 눈동자 안에 있었으려나. 당신은 무언가를 재확인하듯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때 우린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문장을 사실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결국 헤어지자는 말을 한 건 나였지만, 내가 그 말을 하기 이전부터 당신과 나는 이미 헤어진 사람들이었다. 이삼일에 한 번씩 서로의 안부를 건성으로 확인하고(거의 문자로), 한 달에 한두 번은 의무적으로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 조용히 식사하던 사람들. 당시 우리는 ‘우리가 가족 같아져서 이렇게 지낸다.’라는 식의 우스갯소리를 한 번씩 했지만, 거기다 대고 정말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가 우리의 가족들과 얼마나 소란한 재미를 공유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사전 정보 없이 만나 서로를 아주 모른다 해도,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저녁 식사 자리를 즐길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가족 같아진 게 아니었다. 남 같아진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다만 상대의 세계에서 사라져 갈 뿐이었다.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서로의 몸에 관한 관심마저 잃었다. 스킨십의 흥분과 안정감을 찾지 않았던 것이다. 그 정도의 연결조차 포기하였다. 서로의 몸이 서로에게 닿아 있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굴던 사람들이, 인도의 이편 끝과 저편 끝에서 각자 걸으며 오래 침묵하곤 하였다.

물리적인 접촉 횟수뿐 아니라 비물리적인 접촉 횟수도 줄어 갔다. 우리는 눈빛으로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린 너무 어렸던 게 아니라, 너무 늙었던 것 아닐까. 너무 많은 것들을 미리부터 생각하느라고 몸이고 마음이고 지치다 못해 늙어 버렸던 거 아닐까. 죽음을 코앞에 둔 무기력한 사람들처럼, 우리는 병색이 완연한 마음들을 부축해 가며 서로에게 다가갔다. 느리게, 느리게 다가갔다. 멀어지듯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며 실제로는 멀어졌다. 그것은 불가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헤어지는 건 쉽지 않았다. 그만 만나자는 말을 한 게 나라고 해서, 내가 그 이별 통보를 쉽게 한 것은 아니다. 당신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리움이 남지 않을 줄 알았다.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상대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건, 남지도 않고 생기지도 않을 줄 알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지긋지긋해지고도 한참이 지나서 우리는 헤어졌으니까.

헤어진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우리는 말했다. 헤어지던 날에. 그것은 어느 한쪽의 말이 아니라, 양쪽의 말이었다. 니가 그런 말을 하니, 나도 그런 말을 하겠다, 라는 복수의 심정으로 내가 그 말을 한 건 아니다(그 말을 먼저 한 건 당신이었다). 당시에 나는 진심으로 그 말을 했다. 우리가 헤어져야 당신도 나도 행복해질 줄 알았다. 우리 모두 그 말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의 앞날을 태연히 빌어 주기도 했다. “이제 잘 살겠네, 피차….”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마주하고 앉아 있다. 우리가 헤어진 지 5년이 지났다. 당신도 나도 그간 몇 번의 연애를 했고 한두 번의 결혼 결심을 하였다. ‘이 사람과는 내 평생의 시간을 나누어도 괜찮겠다.’, ‘이 사람에게 내 여생을 다 주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고, 누군가를 만지고 싶어 하고, 누군가와 조금이라도 더 얘기하고 싶어 하고…. 우리는 다시 누군가로 인해 안달하였고, 그 안달을 은밀히 기뻐하였다. 정상적인 일상이 되돌아온 느낌.

그러면서 당신과 나는 ‘당신과 나의 우리’를 문득문득 잊고 지냈다. 그런데 우리 모두 그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상이었다. 서로를 잊고 지내면 모든 게 걸림 없이 순탄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니…. 만날 수도 없는데 헤어질 수도 없는 사람이라니….

“다른 사람은 잊어도, 그 사람은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람만은….”이라는 엄숙한 목소리가 당신과 내 안에 있었다. 나에게 그 목소리는 당신만을 향해 있었고, 당신에게 그 목소리는 나만을 향해 있었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통해 서로 계속 연결되어 있었다. 불편하고 싫은데 쉽게 익숙해지는 수갑이었다.

연인이 잠든 밤에 우리는 SNS 검색창에다가 서로의 이름을 검색해 보곤 하였다. 누군가는 상대의 SNS 찾기에 일찌감치 성공하였고, 누군가는 그 일에 뒤늦게 성공하였다. 뭐가 어찌 되었건,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엿보았다. 그 훔쳐보기에 둘 모두 중독되기 시작했다. 그 뜨끔하고 뜨뜻한 쾌감이라니. 마침내 핸드폰을 어딘가로 내려놓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달아올라 있음을 느꼈다. 얼굴로 피가 몰려 있거나, 목덜미가 새빨개져 있거나, 온몸이 후끈하거나, 했다.

우리는 그 염탐 중독에도 죄책감을 느꼈다. 잊는 것에도 죄책감을 느끼고, 잊지 않는 것에도 죄책감을 느끼는 괴이한 관계라니.

토마토 열매들이 모두 멀건 초록색일 때 열매 하나를 몇 입 베어 물어 보다 결국 입속의 것들을 모두 뱉어 버리고 텃밭을 떠난 사람들. 한여름이 되자 텃밭으로 불현듯 되돌아와 새빨간 열매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당신 말대로, 어쩌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일까. 영글지 못한 서로를 맛보는 일이 쓰고 거북하여 결국 서로를 떠났지만, 어느 좋은 때를 만나 자력처럼 서로에게 다시 이끌려 온 사람들.

소중함을 몰라 소중한 걸 소중히 다룰 줄 몰랐던 새파란 마음들이 이제는 정말 새빨갛게 익은 걸까. 우리가 다시 서로를 만난다고 할 때, 그 시간들이 달기만 할까. 여전히 쓰고 텁텁한 부분들이 있지 않을까. 우리는 소중함을 아직도 배워 가는 사람들이지, 소중함을 다 알게 된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당신은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을 매만지며 옆 테이블을 돌아보았다. 옆 테이블은 비어 있었다. 손님을 기다리는 테이블 위에 유리 컵 두 개가 엎어져 있었다. 어쩌면 누군가와 나누어 가진 반지가 한동안 끼워져 있었을 당신의 네 번째 손가락을 나는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랑 다시 시작할 마음 없는 거냐고 당신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건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럼 대체 무슨 마음으로 거기 앉아 있는 거냐고 당신이 나에게 다시 물었다. 너무 소중한 게 있어도 사람은 그것을 두고 떠날 수 있다고 내가 말했다. 당신 눈빛에 뾰족한 고드름들이 열렸다. 그래서 뭘 어떡할 거냐고 당신이 나에게 물었다. 참을성을 기르는 표정이었다.

다시 헤어진대도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나는 말했다. 당신 눈빛에 열린 고드름들이 어딘가로 하나씩 떨어지며 사라졌다. 당신은 다시 옆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누가 완벽하랬나….” 하고 중얼거렸다.

내가 왼손으로 왼눈을 비비며 웃자, 당신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웃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그렇게 웃지 않는 사람 얼굴에서도 자꾸 니가 보여서, 마음이 내내 어지러웠다고. 모든 사람의 모든 웃음이 자꾸 너로 통해서, 사실은 너랑 헤어진 적이 없는 것 같다고. 그래서 누굴 만날 때마다, 양다리 걸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들었다고.

난 너를 한순간도 잊지 못했다고. 잊지 못해 괴로웠고, 잊지 못해 다행이었다고. 마음에 누가 하루도 없는 날은 없었으니까.

넌 그런 기분 느껴 본 적 없냐고. 너 없는 데로만 골라서 가는데도, 자꾸 너랑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옛날엔 니가 내 옆에 있어도 없는 것 같았는데, 너랑 헤어지고는 니가 내 옆에 없는데도 있는 것 같았다고. 가끔은 그런 기분이 나를 위로했다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거기서 위안을 받더라고. 하루도, 반나절도 혼자일 수 없는 인간인 것 같아서. 아무 데도 없는 니가 자꾸 내 곁에, 내 안에 있어서. 없는 게 사실인지 있는 게 사실인지 사실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고. 다만 따뜻했다고. 어느 순간부터는 못 견디게 따뜻했다고.

난 누구랑 헤어져야 뭘 겨우 깨닫는 바보가 아닌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내가 그 바닥에서 알아주는 바보더라고. 그렇게 웃는 니가 보고 싶어서 나 혼자 거울 앞에서 너처럼 웃어 보기도 했다고.

니가 싫었던 게 아니라고. 단 한 순간도 너를 싫어한 적은 없었다고. 너를 싫어했던 게 아니라, 난 널 제대로 좋아할 줄 몰랐던 거라고. 귀한 사람을 귀하게 대할 줄 모른다는 게, 감사를 모른다는 게, 너무 큰 벌이더라고. 그 벌 받을 만큼 받은 거 같으니까, 이제 그만 받고 싶다고.

권태보다 무서운 무지 때문에 너를 허무하게 놓치고 나서, 사실 난 계속 너 같은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정말로 너 같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 다신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이젠 내가 전보다 잘할 수 있다고, 계속 되뇌며 지냈다고. 그러다 너랑 놀랍도록 비슷한 것 같은 사람을 만나 봤다고. 그 사람과 결혼 얘기도 했다고.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마다 내가 뒷걸음질을 치게 되더라고. 니 옆에 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모든 게 너무 늦어 버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 모든 걸 너 아닌 사람한테 준다는 건 자꾸 말이 안 되는 일처럼 느껴졌다고.

결국 버려진다 하더라도, 단 한 번은 나를 너한테 제대로 줘 봐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게 들어서 최근 몇 달 간은 곤란할 정도였다고.

갑작스럽게 많은 말들을 토해낸 당신은 물 두 잔을 연거푸 마신 뒤 한동안 침묵하였다. 마음에 고여 있는 진액 전부를 다 짜내 버린 사람처럼, 당신은 기진맥진하였다. 당신이 내 대답을 기다리는 기색은 아니었다.

무쇠 팬 안에서 지글지글 끓고 있는 새빨간 무언가(당신이 음식 주문을 해서, 나는 그게 뭔지 몰랐다)가 당신과 나 사이에 놓이자마자, 당신은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 서빙을 하던 식당 직원이 당신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천장 온풍기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다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