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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재약산(천황산)

 

 

밀양 재약산(천황산)

 

이십대 후반 쯤 계속된 도전과 몇 번의 실패를 맛보고 난 후 산에를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혼자서 훌쩍 배낭을 메고 떠났다가 도착한 곳이 밀양에 있는 재약산 이었다. 하필 왜 그 산을 골랐는지도 모르겠다. 하루 만에 갔다 올 수 있는 산들이 주위에 (가야산 매화산 비슬산 화왕산 팔공산 등) 있었지만 재약산을 택한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실패의 후유증과 불안한 미래, 재도전을 위한 마음가짐이 필요했을까 산에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나섰던 길이었다.

표충사 앞에서 내려 오래 된 목백일홍이 지키고 있던 표충사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겨울이라 그런지 관람객도 보이지 않고 고요함이 내려앉은 경내를 혼자서 거닐다가 부는 바람을 따라 길을 나섰다.

 

제일 험한 코스였던가 보다. 혼자서 페이스대로 걸어 올라가는데도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파왔다. 굳이 정상까지 올라가야 할 이유도 없었고 빨리 가야할 이유도 없었지만 다리는 계속 앞으로, 위로 올라갔다. 한 겨울임에도 땀이 많이 흘렀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정상에 도착했다.

넓은 억새 평원이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모습에 잠시 정신을 놓고 있다가 산 정상에서 부는 한겨울의 바람이 땀을 식히다 못해 얼어붙게 만들었고 그 추위에 배낭에 있는 패딩을 꺼내 입고도 추워서 같이 가지고 갔던 캪틴큐(저가 양주, 포켓 사이즈)를 한 모금 들이켰다. 속에서 불이 화~악 일어난다. 식도와 위장의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 지 알 것 같았다.

한겨울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꿋꿋이 정상 으름의 바위에 혼자 앉아서 바람과 억새를 보는 기분에 취하고 남들이 봐도 멋있어 보일 것이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그렇게 바람 속에 앉아 있었다. 추위를 느끼면 다시 캪틴큐를 한 모금 하고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가면서 앉아 있었지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운다거나 새로운 결심을 한다거나 하는 생각도 없이 그냥 그렇게 앉아서 스스로의 분위기에 취해 폼을 잡고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옷 속을 파고드는 겨울바람의 냉기에 술병을 들어 보았지만 이미 바닥을 보이면서 비어있었고 조금만 더 있다가 가야지라는 생각은 겨울바람에 날려갔다. 추웠다. 너무 추웠다. 분위기 한 번 잡아보려다가 얼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미련 없이 가방을 정리해서는 다시 길을 나섰다. 꽤나 오래 앉아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삼십분도 체 안 되는 시간이었다.

내려 올 때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작은 분교라는 것과 귀여운 이름에 끌려서일까 고사리 분교가 있던 길로 갔다. 그리고 도착한 고사리 분교 터는 이미 폐교한 지 몇 년이 지나서 인지 퇴락한 분위기에 인적 없이 쓸쓸함이 내려 앉아 있었고,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릴 듯도 하여 한 참을 서성거리다가 그 쓸쓸함이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조용히 돌아서서 길을 내려왔다.

 

산으로 가기 전에는 세상이 끝나고 내일은 없을 것 같은 상실감과 열패감에 죽을 것만 같은 심정이었는데 산 정상에서 맞는 칼바람은 진짜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산을 갔다 오고 나서는 방황(?)하는 척 아파하는 척하는 내 모습이 민망하고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재약산은 그렇게 내 청춘의 민망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지금도 얼굴이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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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짬e(alzzame)VIP 2019-11-22 22:23:35

    내가 직접 느끼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아마도 세상에 없을 겁니다. 또 더 큰 고통 앞에서는 작은 고통은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그것도 나의 고통일때만 말입니다.
    제 말은 당시.님의 고통이 가장 컸을 것이라는 겁니다.   삭제

    • 등산박물관(mt-museum)VIP 2019-11-14 14:15:38

      마지막 구절.. 말씀대로 마음의 고통이 실제 육체의 고통을 만나면 그 크기가 판별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삭제

      • 메이블록(maybugs) 2019-11-08 15:55:04

        척,척,척에 공감이 되는것은 비슷한 경험 때문인것 같습니다. ^^
        재약산을 읽으며 개인적인 노추산을 떠올렸습니다.   삭제

        • 바라보기(qkfkqhrl)VIPVIP 2019-11-07 20:37:31

          그 때 그 시절이 좋았다 생각하십시요.
          재약산이 알고 있는 그 시련의 시절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없습니다.
          시간이 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속에 묻은것들이 더 소중하지요.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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