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랜 독서 습관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그 책의 저자가 출간한 다른 책들도 두루 읽어 보는 습관. 나는 몇몇 작가들이 일생 동안 세상에 내놓은 책을 모조리 다 읽었습니다. 도전 의식이나 오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한 호감 때문입니다. 좋아서요. 나는 일종의 취미로, 뭇 저자들의 책을 독파해 나갔습니다.

나는 ‘이 작가 책이라면 내가 무조건 읽지!’라는 식의 열광적인 애정을 가지고 누군가의 책을 읽는 편은 아닙니다. 독서뿐 아니라 인생의 다른 부분에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무엇에 쉽게 반하지 못합니다(그런데 한 번 어딘가에 반해 버리면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됩니다. 10년은 우습습니다). 하지만 일단 내가 내 마음의 방 한 칸을 내어 준 작가가 생기면, 그 작가의 책을 천천히 오래 즐깁니다. 목 터지는 환호는 없지만, 새 계절을 마주한 자연처럼 조용한 탄성과 미소를 발산하면서요. 나는 느리게 불이 붙고, 그다지 큰 불은 내지 못하지만, 꽤 오랜 시간 불씨를 품고 있는 커다란 통나무 같은 순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일단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고 나면, 새로 읽을 책을 고르러 갔을 때 내 마음 한편이 든든합니다. 만족도 면에서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책 목록이 나에게 있으니까요.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읽고 ‘글쎄, 이 작가 전작에 비하자면 이번 책에선 이렇다 할 여운이 느껴지지 않네.’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게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보장되는 만족도 범위가 있어서요.

내가 어떤 작가의 작품들을 좋아한다는 건, 그 작가가 보여주는 세계관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 세계관 위에서 펼쳐지는 인생 이야기나 상상 이야기는 웬만해선 나에게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한 사람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입니다. 나는 그 작가의 가치관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작가가 세상을 받아들이거나 세상을 창조하는 방식이 좋은 것입니다. 작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가치관을 배경으로 글이라는 퍼포먼스를 창출합니다.

나는 짙은 색 같은 뚜렷한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는 작가들을 흠모합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조금만 읽어 봐도 ‘아, 이건 누가 봐도 그 작가 책이야.’ 할 수 있는 거. 그 작가가 책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캐릭터들이 너무 비슷해서가 아니라요. 그 작가가 선정하는 글의 주제들이 너무 비슷해서가 아니라요. 결과적으로 그 작가가 추구하는 게 뭔지 항상 알겠어서. 그 작가가 쓴 어떤 장르의 글을 읽어도 ‘이건 어느 모로 봐도 그 작가 글이야.’라고 조용히 곱씹을 수 있는 것. 나는 그런 순간을 좋아합니다. 한 마리의 날쌘 새가 되어 한 사람의 세계를 두루두루 둘러볼 수 있는 개운한 느낌을 누리는 순간.

모든 작가의 책에서 그만의 작품 세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까 내가 그렇게 말했었죠. 작가의 작품 세계는 확보되는 거라고. 작가는 자기 글을 계속 써 나가는 동안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점차 확보한다고 난 생각해요. 이를테면 이런 거죠.

여기 컴퓨터 한 대가 있고, 그 컴퓨터 모니터 안에는 게임 캐릭터가 서 있어요. 모니터 화면 오른쪽 아래에는 조그만 지도가 켜져 있는데, 이 지도는 깜깜하기만 합니다. 이름만 지도지, 그냥 새까만 도화지 같아요. 지도는 캐릭터가 서 있는 곳 근처 지형 정도만 동그랗게 보여주고, 그 외의 부분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마우스를 키보드 옆에 끌어다 놓고, 캐릭터를 앞으로 걷게 해 봅니다. 캐릭터가 움직임에 따라, 지도의 검은색이 조금씩 제거되어 나갑니다. 플레이어는 캐릭터가 직접 발 디딘 곳만 지도로 볼 수 있습니다. 캐릭터가 경험하지 않은 공간은 플레이어도 볼 수 없습니다. 플레이어는 캐릭터를 이쪽저쪽으로 움직이게 해서 그 공간의 지도를 확보해야 합니다. 지도 전체를 보고자 한다면요.

글을 쓰는 일은, 생각과 감정이라는 캐릭터를 내 마음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보며 내 마음의 지도를 조금씩 밝혀 나가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몸소 무언가를 느껴보고 몸소 무언가를 고민해 볼 때, 비로소 나는 어떤 것에 대한 내 나름의 가치관을 알게 됩니다. 나는 나라는 이유로 내 가치관과 세계관의 전부를 한꺼번에 파악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경험한 것들에 대한 내 견해만 겨우 알 뿐이에요. 내가 지금 내 가치관, 내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밝혀진 부분의 내 가치관과 세계관일 뿐입니다. 어떤 경험을 통해 나는 생각지도 못한 내 가치관과 세계관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탐구를 부지런히 한 사람들은 폭넓은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그 널따란 가치관과 세계관의 개성적인 면을 숙지하고 있습니다. 일정 시간 이상 글을 써 온 작가들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이야기들 뒷면에 자기 향기를 묻혀 놓아요. 그 작가 글에서만 나는, 고유의 향기. 낙관처럼 찍혀 있는 그 향기를 맡을 때마다, 나는 자발적인 존경심이 내 안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느낍니다. 외면으로 무언가를 뽐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내공을 마음껏 펼쳐 쓸 줄 아는 고수를 만난 기분입니다.

꼭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기 세계의 지도를 큰 부분 확보한 사람들을 나는 봅니다. 자기 안에서 수없는 여행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스스로의 이모저모를 뜯어보는 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알기에(때로 그 일은 위험천만한 도전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크게 탄복하며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두려움을 내려놓게 됩니다. 내 안으로 통하는 문을 다시 열고 차분히 심호흡을 하게 됩니다.

어제 당신이 말했죠. “내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이런 걸 알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

그 말을 할 수 있기까지 사람의 내면에서 얼마나 많은 준비들이 정교한 수준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 모르지 않기에, 나는 당신의 그 말을 일종의 출정식出征式 세레머니로 보았습니다. 출정식, 먼 길을 떠나기 전에 행하는 의식.

오직 혼자여야만 할 수 있는 당신의 내면 여행에서 당신이 되도록 무사하기를 바라며, 혹시 당신이 그곳에서 괴로워하거나 울어야 한다면 그 시간이 충실하되 짧기를 바라며, 나는 되돌아올 당신을 있는 힘껏 반길 준비를 하겠습니다. 당신의 말과 글이 내뿜는 향기의 오묘한 변화를 최대한 꼼꼼하게 느껴 볼 준비도 하구요. 그게 어떤 형태이든, 당신 내면의 확장이 나는 미리부터 기쁩니다. 내가 이런데 당신은 얼마나 기쁠까요. 아마 그 힘으로 나아가는 거겠죠. 새까만 안개 속으로, 사람은.

박다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