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흐릿하게 보이는 모든 것들. 이런 것들은 자주 의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또는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그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모든 건 사람의 간사한 마음과 애틋한 소망이 만든 환상일 뿐, 그곳에 정말로 존재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의심. 어렴풋하게만 보이는 저것의 진짜 모양은 사실 이러할지 모른다는 의심. 아무도 볼 수 없는 그것의 실체는 아마 이런 형태일 거라는 의심. 희미한 모양으로만 식별할 수 있는 저것에는 실체 따위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저것이 애초에 희미한 모양으로만 존재했을 거라는 의심.

 

눈앞에 뻔히 보이는 것도 의심하는 세상입니다. 눈에 잘 띄지 않거나, 아예 안 보이는 것을 의심하기는 얼마나 쉽나요. 그 의심은 얼마나 타당하게 느껴지나요. 제대로 판별할 수 없는 것의 진상을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불투명한 것을 앞에 두고 의심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첫째, 호기심 가지기. 둘째, 의심 품기. 셋째, 관심 두지 않기.

 

불분명한 것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 그리고 불확실한 것에 대한 내밀한 의심은, 나아가는 방향이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호기심은 자신에게 새로운 뭔가를 궁금해하거나 그것에 호감을 가지는 마음입니다. 호기심의 호好는 좋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의심은 자신이 분명히 알지 못하는 뭔가를 믿지 못하거나 그것을 이상하다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의심의 의疑는 ‘믿지 않는다. 괴상하게 여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기심의 기奇는 기특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도 기이하다는 뜻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호기심이라는 단어를 만들 때는 기奇에서 긍정적인 의미만 빌려 온 것 같습니다. 호기심의 기奇가 기이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이 호好와 만나면 ‘기이하게 여기면서도 그것을 좋아한다.’라는 의미가 될 수 있으니, 기奇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이든 크게 상관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 마음에 호기심과 의심이 생기는 이유가 뭘까요. 뭔지 알 수 없는 그 대상의 존재가 타인의 마음에 호기심과 의심을 일으키는 걸까요. 아니면 그 특이한 대상을 마주한 마음이 스스로 호기심과 의심을 일으키는 걸까요. 대상과 마음 사이에는 분명 어떤 상호작용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을 향한 대상의 영향력이 없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호기심과 마음이 개인의 자발적인 의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대상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 전부가 그 대상으로부터 똑같은 영향을 받는 건 아니니까요. 무언가로부터의 영향을 받는 것에서부터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고 있는 거라고 나는 믿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믿습니다. 예전에는 아니었구요.

 

나는 ‘저기에 못 미더운 구석이 있기 때문에 내가 저것을 의심한다.’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쪽이었습니다. 저기에 못 미더운 구석이 있는 게 아니라, 저기에 있는 것을 내가 못 미더워 할 뿐인데요. 그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주 오래도록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 의심에는 그럴싸한 근거가 있다고. 나에게 합리적인 근거가 있어서 내가 뭔가를 의심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의심을 절반 정도는 사실로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의심이라는 것은, 애초에 본인이 불확실한 수준으로 알고 있는 뭔가에 대한 마음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미심쩍어하는 마음이 근거를 가져 봐야, 그것은 순전한 심증이나 부분적인 물증을 바탕으로 둔 근거일 뿐입니다. 합당하다고 하기에는 허술한 점이 너무 많은 근거입니다.

 

믿고 싶지 않아서

믿지 않을 뿐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사람의 의도 또한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의도를 생각하며 누군가는 호기심으로 눈동자를 빛내고, 누군가는 의심으로 눈살을 찌푸립니다.

 

과거에 나는 내 의도의 진실성을 의심 받을 때마다,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내 의도가 얼마나 진실한지 목 아프게 이야기했습니다. 고함이나 비명에 가까운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에겐 너무나도 투명하고 환하게 존재하는 내 순수한 의도가 누군가에게는 시커먼 때처럼 보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요.

 

상대가 내 의도를 잘 모르겠다고 하는 건 이해가 되는데, 상대가 내 의도를 크게 왜곡된 형태로 받아들이거나 아예 내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때는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습니다. 저 사람이 대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걸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단지 모든 상황이 얼른 끝나기만을 바랐습니다. 그 처참한 불신의 현장에서 한시라도 빨리 빠져 나가고 싶었습니다. 칼을 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만 나는 내 심장이 난도질을 당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진심을 그렇게 형편없이 대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그런 한편으로, 나는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내 의도의 진실성이나 순수성을 상대가 믿게 할 수 있다고. 딱하도록 순박한 믿음이었습니다. 믿을 생각이 없는 사람은 부처나 예수가 눈앞에서 되살아나도 그들을 일개 광신도로 몰 것인데.

 

석연찮은 표정으로 “그래, 알겠다.” 하며 나로부터 뒷걸음질 친 사람들이 내가 없는 곳에서 나에 대한 불신을 여전히 들먹이고 있다는 사실을 맞닥뜨릴 만큼 맞닥뜨린 후에, 나는 항복 선언을 했습니다. 이건 내가 덤벼서 될 일이 아니구나. 내가 아무리 발악해도, 저 사람의 물음표를 펼쳐서 느낌표로 만들 수는 없겠구나. 완고한 의심은 사실에 대한 확신보다 끈질길 수도 있는 거구나.

 

사실이 밝혀지는 것과 사실을 믿는 것은 너무나도 별개일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앞에 두고 더는 몸부림치지 않았습니다. 내가 오장육부를 모두 토하듯 쏟아 놓은 진실 앞에서, 누군가는 태평하게 핸드폰 게임에 몰두할 수 있는 것. 그게 인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이 생겨 먹은 모양을 받아들이는 일이 처음에는 몸 곳곳의 힘을 빠지게 하지만, 결국에는 팔다리에 새로운 힘을 싣기 때문입니다. 진작 포기했어야 하는 것을 끝내 포기하고 나면, 사람은 생소한 활력을 느낍니다. 뭔가 가볍다고 느끼구요. 정신적인 중량 변화는 일상에 적지 않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코앞에 사실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 마음에 믿음이 생기는 거였으면, 인류의 역사가 이토록 복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는 이 문장 앞에서 괜찮은 얼굴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내 의도의 순수성이나 진실성에 관한 그 어떤 설득도 하지 않습니다. 내 본심을 못 믿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그것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그 사람을 밀어내듯이 그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말을 합니다. 평범한 어조로. 수건은 작은 방 서랍에 있다고 말하듯이. 내가 뭘 해야 그 사람이 내 본심을 믿는 건 아니라는 믿음이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건, 내가 내 진실을 가지고 아등바등하지 않는 모습에서 어떤 진실성이나 순수성이 보인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진실이라는 자신이 있으니까 그렇게 반듯하게 서 있는 거 아니냐고. 이리 가서 이 말하고, 저리 가서 저 말하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절실하게 호소를 해도 모자란 마당에 어찌 그리 태평하게만 있냐는 사람도 물론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두루 지나쳐 오며, 오랜 격언을 다시금 곱씹었습니다. 사람은 세상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여기로 가도 찬성과 반대를 만나고, 저리로 가도 찬성과 반대를 만난다. 호응만 받는 곳 없고, 야유만 받는 곳도 없다.

 

사람 사이 믿음에 관해, 내가 마침내 다다른 결론이 하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사람을 믿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뭘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요. 그냥 그 사람이 본인에게 괜찮게 느껴져서. 혹은 그 사람이 좋아서. 그래서 그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확고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요. 어떤 이유 때문에 본인이 그 사람을 믿는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본인이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니까 그 사람을 믿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런 사람인 것 같습니다.

 

믿음은 행위를 향하고 있기보다 사람을 향하고 있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람을 배제하고 행위를 믿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이나 태도는, 그 사람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내 사고 과정에 아주 깊이 개입합니다.

 

애초에 나라는 인간을 불신하고 있는 사람에게 내가 꺼낼 말은, 지금은, 없습니다. 그는 그가 믿음을 펼쳐 쓸 수 있는 곳에서 행복하게 지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를 조용히 스쳐 지나갑니다. 나라는 인간도 믿어 달라고 그에게 애원하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그 사람 눈에 내 꼴이 어떻게 되는지 이제는 모르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흉해지지 않는 것이 최선인 관계도 있다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들을 맞물리게 하려고 자꾸 그것들을 부딪치다 보면, 나중에는 그것들이 어디에도 맞물릴 수 없게 망가져 버립니다. 나는 그런 톱니바퀴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