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단둘이 이야기해야 할 일이 간혹 생긴다. 그런 때 주로 말을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상대였는데(감사하게도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때때로 나는 나보다 낯가림이 심한 사람을 만났다. 그런 상황에서는 내가 침묵의 귀퉁이를 조금씩 흔들어 보는 편이다. 자극적이지 않고 편향되어 있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 잠깐 이야기하거나, 상대에게 가벼운 질문을 던져 가며.

기본적으로 나는 사람 사이의 침묵을 제법 잘 견디는 편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시간을 좋아하기도 한다. 그런 게 필요하다는 생각도 있고. 그런데 낯선 이와 공유하는 침묵이 과하게 길어지는 건 원치 않는다. 그래서 서먹한 분위기 위로 내려앉는 침묵이 너무 두꺼워지기 전에, 그것을 걷어내는 편이다. 조금씩.

두 사람이 서로 어색해하는 상황에서 적막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대화가 길을 잃을 수가 있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기 어려운 지점에 다다르는 것이다. 누군가는 긴 침묵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며 자신감을 잃거나(‘난 역시 이런 자리에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네.’), 그 자리에 관한 흥미 자체를 잃을 수도 있다. 후회할 수도 있다. 이런 자리에 괜히 나왔다고. 마음이 거기까지 치달으면, 사람은 자신의 몸만 그 자리에 두고 마음은 다른 곳으로 탈출시킬 수 있다. 누구 하나라도 그렇게 돼 버리면, 안 한 것만 못한 만남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이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만 각자의 생명력을 발휘하는 상황.

나는 내가 머물고 있는 자리의 분위기가 웬만한 활력을 가지고 있길 바란다. 그것이 어지간한 수준의 활력을 품을 수 없다면, 최소한의 활력 정도는 품고 있기를 바라고. 서로가 그 자리에서 적극적으로 뭘 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향한 초점만큼은 잃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을 향한 주의력을 최소한은 유지할 수 있기를. 그러니까 두 사람이 진짜 서로를 만나고 있기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상황의 추이를 봐 가며 대화 자리에서 내 나름의 노력을 쏟는 편이다. 나보다 말수 많은 사람이 내 앞이나 옆에 앉아 별의별 화제들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아 준다면 너무 고맙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앉아 있지만은 않는 것이다. 낯가리는 성격을 앞세워서 어떤 책임을 허공에 흩어 놓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낯을 많이 가린다 해도, 나에게는 입이 있고, 그 입으로 말을 할 수 있다. 머리로는 생각을 할 수 있고. 내가 그 겸연쩍은 자리에 가장 적합한 대화 주제를 떠올릴 수는 없다 해도, 그 자리에 어울릴 것 같은 대화 주제를 꺼낼 수는 있다. 그렇게 상대와 나 사이의 틈을 메워 볼 수 있다. 기막히게 매끄러운 아스팔트길은 못 깔아도, 징검다리는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상대와 나 사이에. 그렇게나마 나는 상대와 나 사이의 연결을 유지해 볼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상대를 위한 일이기보다 나를 위한 일이다. 이게 상대를 위한 일이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이것은 나를 가장 먼저 위하는 일이다.

누구와 함께 있든, 나는 무의미한 순간을 만들고 싶지 않다(그런 걸 원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있다면 왜일까?). 시간도 만남도 땅바닥에 그냥 버리고 싶지 않다. 누군가와 무릎을 맞대고 있음에도 대단한 의미를 만들 수 없는 것 정도는 괜찮지만. 기껏 누굴 만나러 갔는데 거기서 이렇다 할 의미를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나 자신을 크게 낭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은 나만의 낭비이지도 않을 것이다. 상대도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낭비했을 것이다. 상대가 그걸 인지하든 아니든. 상대가 그걸 아까워하든 아니든.

물론 대화는 두 사람이 함께 일궈 나가는 거라, 한쪽의 열의만으로 대화를 이끌고 나가긴 역부족이다. 단순히 낯가림이 심한 게 아니라 나와의 자리에 대한 의지 자체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 때, 나는 그 사람 눈동자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기 어렵다. 그 사람의 영혼은 나와 마주앉을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내 최선을 다한다. ‘아무래도 이 사람하고는 뭘 못하겠네.’ 하는 생각이 들 때까지, 내 나름으로 머리를 열심히 짜내서 썩 괜찮은 말들을 골라 본다. 그럼에도 상대가 돌부처처럼 군다면, 나는 그 자리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 적당한 이유를 대서.

끝까지 묵묵부답인 그 사람과의 자리에서 내가 뭘 건질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사람과 마음을 교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면 그 시간은 낭비된 것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뚜렷한 성과가 있어야 낭비를 면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사람마다 자기만의 사교성을 타고난다. 타인과 잘 사귀는 성질을. 사교성은 본인의 선택과 노력에 의해 발달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재능이 그렇듯이. 나는 훌륭한 사교성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살다가 문득 사교성의 필요성을 깨우쳤다.

그때부터 나는 내 사교성을 길러 보려고 여러 방면을 기웃거렸고, 개인적인 실천도 많이 했다. 그러는 와중에 완성된(내 관점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교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나보다 사교성이 더 없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인간들, 진짜, 너무 제각각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교성을 경험하면서, 나는 ‘그냥 생겨 먹은 대로 살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붙임성이 좋은 것도 아니고 말수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지만, 나는 타인과 사귀는 것 자체에서 문제를 겪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다.’ 싶어서. 대단한 수준의 사교성을 목표로 두는 게 과연 무엇을 위한 건가, 싶어서. 그리고 그 무렵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서. 사교성만 가지고는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좋은 인간관계를 만드는 일에서 사교성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단순한 사교성보다는 개인의 인간성이 좋은 인간관계 만들기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사교성이 좀 떨어져도 사람이 진실하고 정직하고 자기 관계에 임할 때 본심을 내놓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결속력 있는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었다. 암만 사교성이 좋아도 사람이 간사하고 태만하고 자기 관계에 임할 때 계산적인 속내를 내놓는다면, 그 사람은 견고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사교성은 하나의 기술이지 어떤 열쇠가 아니었다. 그것이 좋은 인간관계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점을 깨닫고 나는 얼마나 큰 안도를 느꼈는지.

3.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상대에게 종종 던지는 질문이 있다. 단순히 먹고 자고 하는 식의 연명 활동을 제외하고, 본인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는 일이 있는지. 있다면 그게 뭔지, 혹시 말해 줄 수 있는지. 그게 반드시 물리적인 행위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덧붙이면서. 매일 하는 생각, 매일 곱씹는 기억, 이런 것도 괜찮다고.

습관이나 규칙이 나라는 인간에 관한 (노골적이라고 해도 좋을) 힌트를 여럿 제공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처음 만난 상대에게 그런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진다. 상대에 관한 기초적인 정보를 최대한 알차게 얻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은 대화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사소한 질문 같아도, 그 대답에는 사소하지 않은 것들이 담겨져 온다.

물론 첫 만남에서 나에게 이렇다 할 인상을 주지 못했거나 ‘저 사람은 깊이 알고 싶지 않다.’라는 느낌을 주는 상대에게는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나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마음에도 없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청스러움을 타고나지 못했다. 어쩌면 이것도 내 사교성 정도를 드러내 주는 일면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런 ‘모자란’ 일면들과 일일이 다투지 않는다.

제자리 멀리 뛰기 기록이 3m가 안 된다는 이유로 스스로와 극심하게 다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제자리 멀리 뛰기 능력처럼, 사교성도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기술적인 능력일 뿐이다. 제자리 멀리 뛰기 좀 못해도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 없다. 사교성 좀 떨어져도 사람 만나고 사는 데 아무 지장 없다. 기본적으로는 아무 지장 없다. 모든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친해질 수 없을 뿐이다. 사교성이 남들보다 부족한 사람도 어쨌거나 자기만의 인간관계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그 네트워크가 폭넓지 않을 뿐이다.

모든 사람이 제자리 멀리 뛰기를 잘할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사교성도 그렇다. 노력하면 누구나 자기 기술을 발달시킬 수 있지만, 자기가 어느 수준에서 만족한다면, 그 사람을 나무랄 수 없다. 그 사람은 자기 능력에 따라 자기만의 생활을 꾸릴 것이다. 그 생활이 다른 생활보다 결코 가볍거나 헐겁지는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각자의 인간관계 생태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두는 게 좋은 것 같다. 비교도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으로 두는 것이.

박다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