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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일

 

 

저마다의 인생을 저마다의 연극이라고 가정해 볼 때, 우리는 우리 인생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여러 종류의 역할을 맡긴다. 우리도 누군가의 인생으로 들어가, 어떤 종류의 역할을 맡는다. 우리를 둘러싼 어떤 이들과 우리 자신의 역할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군가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정해져 있다. 가족 역할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그런데 가족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 가정에서 본인 역할을 다 해내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이름만 부모이지 부모 노릇을 전혀 하지 않는 (또는 못하는) 부모가 있다. 부여받았다고 해서 모두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지가 없을 수도 있고, 능력이 없을 수도 있고, 환경이 좋지 못할 수도 있다.

 

방금 말했듯, 본인이 자기 역할 완수에 엄청난 열의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역할 완수를 할 수는 없다. 내 것이라는 이유로 내 역할을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할은 역할이고, 사람은 사람이다. 안 맞는 옷을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그걸 입으려고 내가 고집을 피운다면, 옷이 터지거나 내 살갗이 터지거나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유능한 조력자가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굴뚝같아도, 당장 나에게 그럴 만한 역량이 없다면, 나는 그에게 유능한 조력자 역할을 해 줄 수 없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만한 최소한의 역량을 지니지 않았고, 어떤 사람들은 교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만한 최소한의 역량을 지니지 않았고, 어떤 사람들은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만한 최소한의 역량을 지니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역할은 가지고 있는 역할일 뿐, 수행되는 역할이거나 완수된 역할이 아니다. 너무 냉정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장은 그렇다.

 

받지도 않은 옷을 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대가 원하지 않을 때, 나는 상대에게 어떤 역할을 해 줄 수 없게 된다. 나에게 그럴 만한 역량이 넘치게 갖추어져 있다 하여도.

 

누군가는 우리 인생의 문턱을 넘고 이쪽으로 들어올 때, 제 나름의 계획과 열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어떻게 해 주겠다는….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이 원한 역할을 도맡고,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이 도맡은 역할을 잘 소화하지 못하고,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이 도맡은 역할을 근사하게 소화해 내고,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소망을 처음부터 이루지 못한다. 우리도 똑같다. 우리도 어떤 관계 안에서 우리가 원한 역할을 꿰차고, 어떤 관계 안에서는 우리가 꿰찬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어떤 관계 안에서는 우리가 꿰찬 역할 수행을 참담하게 실패하고, 어떤 관계 안에서는 우리의 소원을 아예 이루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와 친구가 되고 싶어 우리에게로 다가온 사람들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없다. 누군가와 연인 사이로 발전하는 건 그보다 더 까다로운 문제다.

 

어떤 면에서 역할 맡기기와 역할 맡기는 우리 의지와 크게 상관없기도 하다. 친구 하기로 한 사람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에게 연인처럼 굴게 되는 것은, 그들의 교묘한 속임수가 아니고, 자기 기만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그때그때 상황에 적합다고 여겨지는 말과 행동을 할 뿐이다. 별도의 계산 없이, 그냥….

 

그들의 머리에 들어 있는 역할과 마음에 들어 있는 역할이 다른데, 그들은 본인들 마음에 들어 있는 역할을 무의식중에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 편이 더욱 아름다워서. 그 편으로 가는 것이 자기 자신을 실현시키는 일이겠기에. 내가 저 사람의 친구가 아니라 저 사람의 연인일 때 자기 자신이 더욱 자기 자신일 거라는 사실을 어떤 식으로든 알겠기에.

 

‘이것이 저 사람에게 내가 해 주어야 하는 일이다.’라는 마음은 의지로 만들 수도 있지만, 저절로 만들어지기도 한데, 그 마음이 장기적으로 유지되려면 그것의 출생지가 본심이어야 한다. 인위적인 노력이 있어야만 누가 누구에게 어떤 역할을 해 줄 수 있다면, 그 역할의 수명은 그리 길지 못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오래 걸을 수는 없다. 발이 아픈데도 무리하게 걷기를 강행한다면, 결국 발에 탈이 나고 말 것이다. 강제력이 통하는 것도 사실은 잠깐뿐이라는 것이다. 발을 할퀴는 신발을 신고 있다 보면, 걸으려고 해도 못 걷게 되는 순간이 온다. 발보다 여린 살결을 가진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지속 가능한 역할을 수행하는 일은, 그것을 수행한다는 관념을 거의 일으키지 않는다. ‘나는 저 사람하고 사귀는 사람이니까….’라는 마음을 의식적으로 앞세우며 누군가에게 일부러 다정하게 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그 나름의 고귀한 일이다). 당신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처럼 굴게 되는 것이고,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무런 걸림도, 거리낌도 없는 일.

 

당신을 아끼는 일에 관해, 나는 무엇도 억지로 할 필요가 없다. 이때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의 내 역할은 나에게 아주 잘 맞는 신발 같은 것이다. 이 역할은 나에게 불편하지 않다. 전혀. 마치 이것이 내 정체성의 한 부분이라고 느껴질 만큼, 이것은 나에게 친숙하고 좋은 것이다. 아무 힘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일.

 

겉보기에는 내가 당신에게 이러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나는 그냥 나 자신이 되어서 당신과 함께 생활할 뿐이다. 나와 당신의 관계 위에 ‘연인 역할 수행’이라는 업무가 얹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당신이 관계하는 동안 ‘연인 역할 수행’이라는 업무가 저절로 수행되는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우리가 연인이 되기로 합의해서 연인이 된 것이지만, 내가 당신의 연인인 모든 순간을 통틀어, 나는 당신의 연인이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전혀.

 

연인戀人.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

사랑해서 누군가를

몹시 그리워하는 사람.

사랑해서 누군가를

절박하게 생각하는 사람.

 

나는 당신을 이미 사랑하고 있으므로, 이제 와 새삼스럽게 연인의 자리를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으니까.

 

대부분의 사귀자는 말도, 이미 일어난 현상을 뒤늦게 언어화하는 일일 뿐이다. 이미 사귀고 있는 사람들이 사귀자는 말과 그에 대한 대답으로 자신들의 관계를 조금 더 명확하게 만드는 일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처음에는 본인의 의지를 발휘해 의식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그렇기에 누군가를 사랑하겠다고 기쁘게 마음먹고 그에게로 다가가는 모든 걸음이 고귀하다고 말한 것이다.

 

내 사랑이 어느 쪽이든 나는 상관없다. 한눈에 반해 버려서 처음부터 손짓 하나 안 틀리고 춤추듯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만큼, 누군가에게 서서히 반하며 더듬더듬 춤 동작을 익히듯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또한 환하다.

 

무엇이 더 온전한 사랑이겠는가. 어리석은 질문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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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라보기(qkfkqhrl)VIPVIP 2020-01-14 21:23:26 211.252.***.***

    연인이라는 역할이 처음부터 자연스러웠다면 그 이상 좋을일도 없겠다.
    그러나 사람관계라는 것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는 않을터,
    순간순간 지내왔던 사실들이 어느날 확인이 되었고 그 사실에 서로가 동의 했을 것이다.
    세상이 그렇다 다른 사람이 살고 또 다른 사람과는 또다른 관계에 놓여 있어서 세상은 확인 작업이 필요 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도 연인이 되기까지 몇번이고 관계 정립이 있었을 것이다.
    관계는 다양하고 그 다양함의 역할 때문일 것이다.
    같은말도 관계에 따라 달리 들릴 것이다.
    잘 봤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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