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별로 좋아하지 않던 단어가 문득 새롭게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읽고 쓰는 직업을 가진 나는, 똑같은 단어를 많으면 수천 번도 넘게 들여다봐야 하는데, 간혹 어떤 단어의 어감이 이전과 달라져서는 나를 별안간 흔들어댄다. 내 몸체를 어느 쪽으로 부드럽게 밀거나. 내 고개의 각도를 살짝 틀게 하거나.

내심 좋아해서 틈 날 때마다 문장 안에 끼워 넣던 단어가 그저 그런 단어로 느껴지는 날도 있다. 어떤 단어에 갑작스러운 싫증을 낼 때도 있다. 단어에도 싫증을 내는 마음이라니…. 좋고 싫음은 대상이 아니라 내 문제임을 다시금 절감하는 순간이다.

그 단어가 가진 정확한 뜻을 내가 알게 되었을 때(글 쓰다 사전 찾아보면서 그걸 알게 되는 경우가 가장 많다), 그 단어의 어감 변화를 느끼기가 가장 쉽다. ‘아, 이게 정확하게는 이런 뜻을 가지고 있구나…. 여기까진 몰랐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 그 단어에 대한 내 인상은 다양한 수준으로 바뀐다.

‘이거 뭐, 대충 이런 뜻이겠지.’ 하고 그냥 써 버리는 단어들이 나에게는 아직 꽤 많아서, 나는 아직도 그런 순간을 맞닥뜨린다. 어떤 단어의 실체를 알게 되어, 그 단어에 대한 오해를 비로소 푸는 순간.

그런 순간마다, 내 마음 처마 한쪽에 고드름들이 주렁주렁 생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뭔가를 괜히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일들이 인생의 얼마나 많은 부위들을 차지하고 있는지 실감되어…. 마음 한편에 한겨울이 몰아닥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다.

‘그냥’이라는 이름을 가진 벽들을 부수고 그 너머의 다채로운 세계들을 하나씩 발견해 나가는 일이 인생인 건가, 하는 생각이 그 고드름들 속에서 투명하게 반짝거리고 있다.

‘그냥’은 내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2.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서 잠깐 책을 읽었다. 원래 같으면 평일에는 책상 앞에 앉자마자 산문 초고 작업부터 하는데, 아까는 그럴 마음이 나지 않았다(마음 따라 생활 스케줄을 변동하는 일은 좀처럼 없는데). 나는 어제 읽다 만 책을 펼쳐 들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을 몇 개 읽었다. 그러다가 ‘속셈’이라는 단어를 만났다.

어려서는 그 단어가 불순한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뭔가 간사하고 추악한 짓을 저지르고 만 사람에게 “너 대체 무슨 속셈으로….”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 그런 고정관념이 생긴 듯하다(주로 TV에서 그런 장면들을 보았다). ‘꿍꿍이, 수작, 짓거리’ 같은 단어에 스며들어 있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속셈이라는 단어 안에도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것들 자체에 부정적인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체에.

‘그런데 속셈은 속에서 셈하는 일, 그뿐이지 않나. 그게 꼭 응큼한 건가. 아니지 않나. 응큼한 속셈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속셈들 전부가 응큼한 건 아니지 않나.’

속셈이라는 단어에서 시선이 떠나자마자, 그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사전을 켰다.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궁리하거나 계획하는 것. 그리고 암산하는 것. 속셈은 그런 의미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 어디에도 불순한 내용, 불온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꿍꿍이도 마찬가지였다. 꿍꿍이는 남들 시선을 피해 속으로 어떤 일을 도모하며 우물쭈물하는 일을 뜻했다. 여기에도 특별히 나쁜 의미는 없다. 나쁜 꿍꿍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모든 꿍꿍이들이 나쁜 건 아니다.

물론 ‘그렇게 남들 눈 피해 가며 뭔가를 하는 건 안 좋은 거다. 그건 엄연히 타인을 속이는 짓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건 그 사람 개인적인 견해이지, 진실은 아니니까. 속인다는 건 타인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건데,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걸 상대에게 보여주지 않는 건 상대를 속이는 일이 아니다. 속았다는 생각만 있을 뿐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화를 낸 순간들을

체로 잘 거르고 나면

‘그건 나쁘다.’라는 내 생각만 남는다는

일기를 쓴 적 있다.

그 일기를 다시 써야 할 듯했다.

흔해 빠진 단어들 뜻도 이렇게 단단히 오해하며 살아가는데, 내가 어떻게 나 아닌 누군가를 다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단어의 뜻은 대개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내가 뭘 얼마나 봤다고 그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을 안다.’

이 문장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거나

이 문장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그나마 인간을 덜 오해하고 사는 것 같다.

안다고 할수록 사실은 모르는 것이다.

인간을 알아 가는 일에서 ‘그 누구도 한 인간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라는 것이 가장 정확한 결론 아닐까. 본인 자신에게도 ‘나’라는 것은 자주 안개 같은 것. 그 안개를 모두 걷었다고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 확언은 얼마나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을까. “안다.”라는 말도 결국에는 하나의 주장에 불과할 수 있으니까.

모르는 것들이 자꾸 많아지는 게 정상이라는 생각을 지금은 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해서든, 뭐에 대해서든…. 예전에는 시간이 갈수록 내가 멍청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영 좋지 않았는데. 인생이 원래 이렇다고 생각하니, 거기서 딱히 패배감 같은 걸 느끼지 않는다. 살아갈수록 사람의 인생은 확장되고, 그만큼 불확실의 지대도 넓어진다. 그뿐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 간다는 건

그만큼 내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 간다는 것.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특별한 불행이나 장애가 아니다.

모르는 것들이 계속 많아질 테니, 인생에 대한 탐구심 같은 건 일찌감치 버려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것은,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하며 살아야 인생이 덜 피곤하다는 얘기다. 다 알고 살 수는 없는 게 인생이니까.

인생이 생겨 먹은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과 인생을 포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인생이 생겨 먹은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오히려 인생을 포기하기가 더 쉽지 않을까. 빠져 나갈 수 없는 공간에 갇힌 채로 악에 받쳐 버둥거리다가 졸도해 버리고 마는 것. 그 안에서 그는 뭔가 쓸 만하고 재미난 일을 할 수도 있었는데.

대상을 더욱 폭넓게, 더욱 깊이 관찰할수록 ‘나는 저것을 모른다.’라는 결론에 빨리 다다른다. 그리고 내 경우, 그 결론은 나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렇다.

어려서는 무언가를 모른다고 할수록 그것과 멀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는데, 지금은 무언가를 모른다고 할수록 그것과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박다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