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내 생활을 경계심 없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 별일 없이도 별의별 얘기들을 다 나누게 되는 사람들. 그들은 내 가족이기도 하고, 내 가족이 아니기도 하다. 그들은 내 친구이기도 하고, 내 친구가 아니기도 하다. 그들은 내 연인이기도 하고, 내 연인이 아니기도 하다. 그들은 아무나이기도 하고, 아무나가 아니기도 하다.

가끔 나는 내 세계의 뒷면을 누군가에게 꾸준히 보여 준다. 그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을 믿어서. 그리고 또 가끔, 나는 본인 세계의 이면을 나에게 꾸준히 보여 주는 누군가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본다.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건지, 나를 믿는 건지, 혼자 생각해 보면서. 그 생각의 답을 절반쯤은 아는 것 같은 기분은 얼마나 야릇한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과 누군가를 믿는 것은 어쩌면 한 몸이겠기에, 나는 그 둘을 구분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는다. 뭐가 먼저인지도 사실 불분명하다. 사람은 누군가를 좋아해서 그를 믿는가. 아니면, 그를 믿어서 (또는 믿을 수 있어서) 그를 좋아하는가. 뭐가 먼저인지 중요한가.

뭐가 먼저 발생되었건, 믿음과 호감은 한 세트다. 일종의 묶음 상품처럼, 항상 같이 있는 것이다. 믿음과 호감의 협업에 대해 인간이 알아 둬야 할 건, 이뿐인지도 모른다. 더 알려고 하면 머릿속만 복잡할 뿐….

아무튼 자기 생의 안과 밖을 내 쪽으로 자꾸 내보이는 사람은 나에게 어떤 좋은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가 나에게 그 좋은 마음만 품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 사람은 나에 대한 좋은 마음과 개인적인 목적을 가졌을 수도 있고, 그냥 좋은 마음만 가졌을 수도 있고, 그렇다. 그 사람 내면에 뭐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는 그 사람만 알 것이다. 때로는 그 사람도 모를 것이다. 본인이 왜 자기 생의 이모저모를 나에게 부지런히 보여주게 되는지. 믿음과 호감의 협업은 간혹 그들의 숙주宿主도 모르게 이루어지니까.

2.

“너무 가까우면 한 번씩 베이지.”

한 번씩 당신은 그런 말을 했다. 사람들 사이가 너무 가까워 그들이 온갖 것들을 나누다 보면, 한 번씩 누가 누구를 베고 만다고. 이유가 뭐였건, 이쪽이 저쪽을 벤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자신에게서 칼날이 돋아날 때를 정확히 알아차리고, 그때부터 자신을 차분하게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냐고. 당신 자신도 그 일에 아직 숙련되지 못했다고. 당신 자신이 그런 마당에, 누구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냐고.

당신은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위기 대처 능력을 믿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누가 당신과 상관없는 어떤 일로 날을 세울 때면, 그에게서 몇 걸음 물러선다고 하였다. 그는 당신을 해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는 당신을 해할 수 있으니, 당신은 그에게서 한동안 떨어져 있는다고 하였다. 그가 당신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어도. 의리로 그의 칼날에 맞아 주지 않는다고. 그건 그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니까.

“우리가 지금 너무 가깝지?”

언젠가 당신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내가 약속 시간보다 10분 늦게 약속 장소에 나타나, 모르겠단 말만 뱉어 놓고 있던 때(나는 당신을 만나기 직전에 별로 유쾌하지 못한 일을 겪었다).

당신이 그 말을 하자마자, 나는 당신을 돌아보았다. 당신은 당신이 피우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내려놓고, 날숨을 오래 내쉬었다. 그러는 동안 당신은 뭔가를 정리하고 있는 듯했다.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나는 당신 입가를 적시는 새하얀 연기를 바라보며, 내가 당신에게 실수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애꿎은 당신에게. 등허리가 순식간에 뜨끈해졌다.

그날 당신은 내 사과를 듣고 “응, 괜찮아.”라고 하더니,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당신은 무엇에도 붙잡히지 않고 나와 헤어졌다. 물론 당신은 나에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가벼운 신경질을 내지도 않았다. 침묵으로 분노를 대신하지도 않았다.

당신은 다만 이 말만 남길 뿐이었다.

“우리가 지금은 너무 가까워. 그래서야.”

그날 이후로, 당신은 나에게 아무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내 연락에 응답하지도 않았다. 열흘쯤 그랬다. 나는 당신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나 스스로를 책망하였다. 작정하고 그런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당신에게 무례하게 굴고 만 나 자신을. 당신을 불러 놓고, 당신에게 칼날만 들이민 나 자신을.

그 오랜 자책 끝에, 나는 당신이 예전에 나에게 해 준 말들을 떠올렸다. 사람은 자신이 칼날로 변하는 순간, 자신이 그렇게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모두가 그 일을 어려워하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나는 항상 준비되어 있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내가 칼날이 되고 있단 걸 깨달을 준비, 누가 칼날이 되고 있을 때 그에게서 멀어질 준비. 나는 그 칼날이면서 그 칼날이 아니다. 칼날이 되고 말았을 때,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닐 때, 나는 분노 그 자체다.

사람이 사람을 칼날로 만드는 에너지는 분노라고 당신은 생각한다. 자신이 칼날이 되고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또한 분노 때문이라고. 분노는 사람의 오감과 정신을 먹통으로 만드니까.

분노는 숙주의 의식에 자신만 남겨 두고자 하는 욕구가 상당히 강하다고, 당신은 말했다. 그리하여 사람이 뭔가에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것만 하기가 쉽다고. 다른 건 돌아보지 못하고. 그래서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감정 중 하나가 분노라고. 방심하면 방심할수록, 본인 손으로 더 많은 것들을 베게 될 테니까. 본인 손으로. 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 순으로.

박다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