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아 버린 것 같으면 말해.”

재은은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수건을 접는다. 나는 재은의 말을 정확히 듣지 못했다. 개수대 물을 잠그고 나는 재은을 돌아본다. “뭐? 뭘 말해?”

재은은 소맷부리에 구멍이 난 기모 내복을 개키고 있다. “낡은 거 같으면 말하라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싱크대를 휘둘러본다. “뭐가 낡아?”

“너.”

“응? 내가 왜 낡아.”

“그럼 낡지, 안 낡아?”

재은이 말을 맺고 한숨을 내쉰다. 재은의 두 손이 개키다 만 내복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마음이….”

나는 고무장갑을 벗고 재은 쪽으로 돌아선다. 재은은 리모컨으로 TV 볼륨을 낮추다가 TV 전원을 아예 꺼 버린다. 누군가가 우리 집 현관문 너머에서 달리고 있다. 경쾌한 발소리.

재은이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싱크대 앞에 주저앉아 재은의 얼굴을 살핀다. “내 마음이 낡았어? 니가 보기에 그래? 그래서 그래?”

“아직은 아닌데.”

“그럴 거 같다?”

“그럴지도 모른다, 뭐 그런 얘기지. 아니, 솔직히 다들 그렇다고 하더라.”

“다들 누구? 너 오늘 누구 만났어. 누구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내 말이 끝나자마자 재은은 자신의 핸드폰 쪽으로 눈길을 준다. “애들 만났지, 뭐.”

“현영 씨랑, 그….”

“응.”

“거기서 뭔 소리 듣고 왔어?”

내 질문이 불러온 건 재은은 답이 아니라 단단한 적막이다. 재은은 다시 내복을 개킨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연다. “뭐 좀 마실래?”

“아니, 응, 나 그거 좀 줘. 그거….”

“단술?”

“응. 곧 쉬겠더라. 이번 주 안에 다 먹어야 돼, 그거.”

나는 재은의 어머니가 택배로 보내 주신 단술 병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이거 한 번 끓일까? 따뜻하게 먹을까? 나도 그렇게 먹는 게 더 좋은데.”

“냄새 맡아 봐.”

“냄새는 괜찮은데…. 너 지금 찬 거 먹으면 안 돼. 목 아프잖아.”

내 말을 들은 재은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응.” 한다. “끓여 먹자. 달겠네. 정신 들겠다.”

 

다 개킨 빨래들을 제자리에 두고 나온 재은이 식탁 앞에 앉는다. 냄비 안쪽 가장자리에서 자잘한 거품이 일고, 물러진 밥알들은 단술 안에서 빠르게 헤엄친다. 이제 단술이 끓을 모양이다. 냉장고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난다.

뜨거운 단내가 맡아진다. 재은의 어머니가 재은에게 끓인 단술을 자주 먹였다고 한다. 배탈이 자주 나는 재은에게. 위장이 약한 데다 입까지 짧아, 항상 몸이 메말라 있던 어린 재은에게.

재은은 펄펄 끓은 단술을 후후 불어 가며 먹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재은의 입을 축이는 게 단순한 단술인지 추억인지 모성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재은은 마음이 어수선할 때마다 자기 본가에서 보낸 음식들을 찾아 먹었다. 재은이 지금 단술이 끓길 기다리고 있다는 건, 그리 좋은 사인이 아닐 수도 있다.

 

재은의 어머니가 재은을 대하는 마음은 내가 재은을 대하는 마음보다 오래되었다. 하지만 재은의 어머니가 재은을 향해 품고 있는 그 마음은 낡은 마음이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마음은 낡을 수 있다. 낡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헛기침을 한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이만 쫓고자 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헛기침이 나온다. 아랫배 쪽에 뭔가가 뭉쳐 있는 듯하다. 익숙한 감각이다. 불안하다. 적잖이.

이 단술이 다 끓고 나면, 재은은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아무도 나를 밀지 않았는데, 내 몸이 어느 쪽으로 한없이 밀려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뭔가가 낡았다고 내가 말하면, 재은은 나를 떠나려나. 아니면 재은도 고백하려나. 사실은 자기 안에 있는 것들도 낡을 대로 낡아 있다고. 백화점 같았던 우리 사이가 고물상 같아져도, 우리가 계속 서로를 마주 보며 다정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낡았다…. 이 단어가 부정적인 단어라고 생각해 본 적 한 번도 없는데. 재은의 입에서 나온 ‘낡았다.’가 ‘끝났다.’처럼 들려서, 나는 어딘가로 달아나고 싶은 기분을 느낀다. 정작 낡은 건 아무것도 없는데, 아직.

언제라도 재은이 나를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 같다. 인간관계에 버리고 말고 하는 게 어디 있다고. 어느 한쪽이라도 마음이 다하면 둘이 자연히 갈라지는 건데. 관계의 작용이 다한 것뿐인데.

내가 누구한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면 자기 연민이라도 남으니, 자꾸 그런 쪽으로 내 생각이 뻗쳐 가는 걸까. 누군가의 빈자리를 자기 연민으로 채운다는 게 그리 매력적인 옵션은 아닌 것 같지만. 외로운 것보다는 구질구질한 게 낫다, 이건지.

 

나는 다 끓은 단술을 큼직한 머그컵 두 개에 나눠 담는다. “천천히 마셔. 저번처럼 또 혀 다 데지 말고.”

내가 식탁 앞에 앉자, 재은이 숨을 크게 들이쉬며 나를 바라본다. “이제 이런 표정 안 지을 때 되지 않았나.”

컵 밑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던 내 시선이 재은의 눈동자로 향한다. “응?”

“너, 배 아프지. 머릿속 복잡하지?”

재은이 그렇게 물은 뒤 “으유….” 하며 웃는다. “이번엔 어디까지 상상했는데? 이번에도 혼자 되는 상상했어? 나는 또 매정하게 너 두고 어디로 가 버리고?”

“아니야.”

나는 거짓말했다. “상상은 무슨….”

재은이 안경을 벗고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쥔다. 재은의 안경알이 더러워져 있다. 나는 티슈 한 장을 뽑는다. 그걸로 재은의 안경알을 닦으려고. 재은이 컵에서 두 손을 황급히 떼며 나를 본다. “어우, 뜨겁다. 좋네.”

재은의 시선이 느껴지지만, 나는 안경알 닦기에 몰두한다. 아니, 몰두하는 척한다. 정신이 산만하다. 아랫배는 아직 묵직하고.

 

한 달 전쯤의 일이다. 토요일이었다. 오촌 조카 돌잔치 뒤풀이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집으로 들어온 내가 신발도 벗지 않고 엉엉 울었단다(내 기억에는 없는 일이다). 현관에서. 그때가 오후 4시쯤이었다고 하는데, 낮잠에서 방금 깬 재은의 앞에서 나는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엎어져 통곡하였다. 그러면서 계속하는 말이 “재은아, 나 버리지 마. 안 버릴 거지? 제발 버리지 마. 버리지만 마.”였단다. 태어나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그 다음 날 아침, 내가 일어나자마자 재은이 나를 붙들고 물었다. 내가 언제 너 버리려 했냐고. 사람 속상해 미치게 왜 그런 말하냐고. 내가 언제 헤어지자고 한 적 있냐고. 내가 아무 대꾸 못하고 눈알만 굴리고 있자, 재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기억이 안 나는 거지?”

나는 부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재은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 근데 눈이 이상해. 뭘 잘못 먹었나….”

 

“넌 확신할 수 있어?”

나에게서 건네받은 안경을 쓰며 재은이 물었다. 재은의 오른뺨에 하얀 실밥 같은 것이 묻어 있다.

“뭘?”

재은의 오른뺨 쪽으로 손을 뻗으며 내가 되물었다. 재은이 자신의 오른뺨을 내 쪽으로 돌려 준다. “왜, 뭐 있어, 여기?”

“응. 이제 됐다.”

“넌 나 안 버릴 수 있어?”

그렇게 말한 재은이 내 시선을 피한다. “내가 골동품 같아져도 지금처럼 나 데리고 살 수 있냐고.”

“누가 뭐라던데. 전후 맥락도 모르고 이런 얘기하는 거, 나….”

“알아. 너 그런 거 싫어하는 거.”

“누가 좋아하겠어. 뭔 소릴 들었길래 이래? 재은아, 나 걱정해야 돼?”

내 말을 들은 재은이 검지로 안경을 추어올리며 고갤 젓는다. “걱정할 일 정도는 아니고.”

“그럼?”

“그냥…. 미안. 답답하겠다.”

“다음에 다시 얘기할까?”

“그래, 그러자.”

재은이 그렇게 대답하고는 컵을 입에 댄다. 현관문 밖에서 누군가가 다시 뛴다.

 

“잘 거야?”

화장실에서 칫솔을 물고 나온 나에게 재은이 물었다.

“몇 시지? 좀 졸리는데.”

“11시 3분.”

“자야지. 넌?”

“자야지….”

“왜, 아까 그 얘기 마저 하고 싶어?”

“응.”

재은이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물고 말했다. 나는 화장실에 도로 들어간다. “양치 빨리 끝내고 나올게.”

 

“새로울 게 없을 거래. 그래서 궁금한 것도 없고.”

재은이 중얼거렸다. 나는 재은을 돌아본다. 재은은 이불을 덮고 누워 눈을 감고 있다. “우리처럼 오래된 사람들…. 서로….”

“난 아닌데. 아직 나한테 너 새로워. 나 아직 너한테 궁금한 것도 많고.”

“나도 아직 아니야.”

재은이 강하게 해명하듯 목소리를 높인다. 재은의 목소리 끝이 갈라져 있다. 나는 이불을 들추고 침대 안으로 들어간다. 섬유유연제 냄새가 얼핏 맡아진다.

“낡은 마음이 뭐야.”

내가 억양 없이 물었다. “그게 정확히 뭔데. 너 아까 그거, 별로 안 좋은 거처럼 말하는 거 같아서.”

“무감각한 거, 뭐, 그런 거 아니겠어? 두 사람이 몸만 같이 있는 거.”

“익숙해지는 거랑 무감각해지는 거랑은 다르지.”

내 입에서 그 말이 불쑥 나왔다.

“그렇지.”

재은이 귓속말하듯 말했다. “그렇지….”

“나는 너 좋은데, 재은아. 예전처럼 내가 너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정도가 달라졌다는 게 아니라, 종류가 달라진 거야. 좋아하는 마음의 종류가. 새로울 게 없는 인간은 없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인간, 자꾸 바뀌니까. 저 사람은 새로울 게 없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겠지. 마음이 너무 낡아서 뭘 제대로 못 보는 거야. 자기가 여태 본 게 전부라고만 생각하고….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까 마음 낡는 거, 안 좋은 일 맞네. 니 마음은 어떤데?”

“뭐가?”

“너한테 난 어떠냐고.”

“내가 무감각했으면, 지금 이런 얘기하겠어?”

“돌려 말하지 말고.”

“좋아. 좋아, 너. 지금 좀 떨리고…. 너 처음 봤을 때 내 마음하고 지금 내 마음하고, 다르지. 나도 그래. 너 보고 있으면 한 번씩, 이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사람 맞나, 싶고…. 나한테도 아직 너 새로워. 새로워서 계속 궁금하고. 니가 내 앞에선 항상 비밀 없이 다 열려 있으니까, 그게 고맙기도 하고.”

“근데 니 친구가 너한테 해 준 말은 마음에 걸리고?”

“아니라곤 못하겠어.”

“걱정돼? 우리가 그렇게 될까 봐?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게 아닌 사람들 돼 가지고, 저녁에 만나면 자기 직전까지 TV나 같이 보고…. 그런 사이 될까 봐?”

“그렇게 지내는 사람들 많잖아.”

“전부는 아니잖아.”

“난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어.”

“뭘?”

“넌 나 버리고 싶은 적 없었는지.”

재은이 그 말을 남기고 돌아눕는다. 나는 천장을 보고 누워 눈을 감는다. “없어. 한 번도, 반 번도 없어.”

“왜?”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 나랑 헤어지면, 아무도 안 만날 거야?”

재은이 그렇게 물으며 다시 내 쪽으로 돌아눕는다. “너 전에 그랬잖아. 나랑 헤어지면 평생 혼자 살 거 같다고. 아직 그 마음 그대로야?”

“왜. 내가 그랬음 좋겠어?”

“아니, 뭐, 니가 그랬음 좋겠다, 라기보다는….”

“확답 못 주겠는데. 너 만나기 전엔 나 그냥 계속 혼자 살려고 했어. 그 확신 깨고 너랑 살잖아, 나, 지금.”

내 대답을 들은 재은은 몸에서 힘을 빼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니가 나 아님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 되길 바란 건 아니지만…. 좀 그러네.”

“뭐가?”

“니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살 수 있단 생각하니까, 내 마음이.”

“어떤데?”

“별로야. 질투가 나는 건 아니고.”

“아니고?”

“니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이런 생각.”

재은의 그 말이 내 마음 안쪽에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나는 이불 속에서 재은의 손을 찾아 쥔다. 재은의 손은 차다.

재은이 온몸을 꼼지락거리더니 내 베개에 자신의 뺨을 댄다. “너 이런 표정 지을 때마다, 내가 뭔가 해낸 기분이 들어.”

“왜, 내 표정이 어떤데.”

“어, 없어졌다, 그 표정.”

재은이 그렇게 말하며 웃는다. 거실에서 재은의 핸드폰이 울린다. 벨소리다. 재은이 몸을 반쯤 일으킨다. “뭐지.”

“받아 봐. 급한 전화일 수도 있잖아.”

 

“현영이네.”

재은이 거실에서 중얼거렸다. 벨소리는 계속 울리고 있다.

“받지 마!”

내가 누운 채로 소리쳤다. 재은이 웃음을 터뜨리며 “왜!” 하고 소리친다.

“받지 마!”

내가 메아리처럼 소리치자, 재은이 다시 웃는다. 벨소리가 꺼진다. 재은이 거실 테이블에 핸드폰 내려놓는 소리가 이쪽으로 넘어온다. 거실 불이 꺼진다. 어둠 속에서 재은이 다시 웃음을 터뜨린다. “또 해 봐.”

“뭘?”

“받지 마! 그거.”

“왜?”

“귀여워서.”

재은이 말끝에 이불을 들춘다. 거실에서 다시 재은의 핸드폰이 울린다.

“받지 마!”

재은과 내가 동시에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