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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댓말 하는 어른이 좋아서

 

 

좋아하는 어른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어려서, 또는, 다 자라서도 당신은 어떤 어른을 좋아했냐고.

내 대답을 기다리며 당신은 말했다. 어떤 면에서 사람은 그 마음(어떤 종류의 어른을 좋아하는 마음)을 열심히 닮으며 살아가게 되는 거 같다고. 그렇게 어떤 방향을 향해 자라나게 되는 거 같다고. 듬성듬성하던 마음을 촘촘하게 만들면서, 조그맣던 생각을 부풀리면서, 흐릿하던 태도를 분명해지도록 만들면서, 본인 스스로를 형성해 나가는 것 같다고. 정신의 구체적인 모양을, 고유한 무늬를 갖추어 나가는 것 같다고.

내가 내 뺨을 긁으며 계속 생각에 빠져 있자, 당신은 이런 말도 했다. ‘좋은 어른’이라는 자기만의 기준을 가진 사람은 남들보다 빨리 어른이 되는 거 같다고. 그러니까, 어른다운 어른이…. 어른이라는 이름만 가진 사람이 아니라, 어른으로서의 삶을 가진 사람이. ‘항상’까지는 어려워도, 필요할 때만큼은 어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괜한 고집을 부리거나 혈기에 사로잡힐 시간에, 차분한 이성과 독립적인 판단력을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결론을 말하듯, 당신은 박수를 한 번 치며 이렇게 말했다. ‘좋은 어른’이라는 건 결국 ‘좋은 인간’에 관한 거라고. 인간됨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자기 됨됨이를 가지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자기가 어떤 어른이 되든 상관없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어떤 인간으로 살아도 상관없다고 하는 사람 아니겠냐고. 그러니 그건 본인 존재에 대한 총체적인 외면이겠다고. 방관이겠다고. 포기이겠다고.

그래서 묻는다고. 당신은 어떤 어른을 좋아했냐고. 좋아하냐고.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면, 당신이 그걸 지금부터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고. 난 당신이 당신을 외면하거나 방관하거나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고. 주제넘었다면 미안하지만, 당신이 항상 뭔가를 추구하는 것 같아, 언젠가 한 번은 이 질문을 해 보고 싶었다고.

 

“함부로 말 놓지 않는 어른이요.”

잠깐의 침묵을 깨고 내가 말했다. “제가 그런 어른만 좋아한 건 아니지만, 일단은 그 생각부터 나서…. 나를 몇 번 진득하게 만나 본 것도 아니고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한테 함부로 말 놓고, 내 기분 상관없이 온갖 말 다 해 버리는 어른은, 좋아하지 않았어요. 저는 그런 어른을 정말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만나는 상대의 나이에 따라 자기 태도를 큰 폭으로 바꾸는 사람과는 긴 시간을 함께하고 싶지 않았어요. 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가진 어른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근데 저만 그런 건 아닐걸요. 그렇지 않아요?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애들은 속도 없나…. 오히려 걔들이 우리보다 더 민감한데. 물론, 모든 어른들이 저한테 존댓말을 써 주길 바란 건 아니에요. 존댓말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존댓말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죠. 존중의 상징. 전 사람을 존중하는 어른이 좋았어요. 차별 없이, 사람을 존중하는 어른.”

내 이야기가 끝나자, 당신은 버스 차창 밖을 내다보며 조금 신음하였다. 당신의 옆얼굴이 얼마간 일그러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버스 내부를 훑어보다가, 다시 당신과 함께 차창 너머를 쳐다보았다.

겨울방학이 끝나지 않았는지, 차창 밖의 중학교는 텅 비어 있었다. 인조 잔디가 푸르게 깔린 운동장 양편에는 새하얀 축구골대가 세워져 있었다(새것 같았다). 그 두 개의 축구골대가 거대한 괄호처럼 보였다. 나는 내 인생의 괄호 안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을까.

버스가 신도시 쪽으로 접어들며 덜컹거렸다. 당신이 나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갑자기 생각나는 사람들이 좀 있어서. 왜 어딜 가나 그런 어른들이 있는 걸까요. 속상하다, 속상해.”

 

어른이 된다는 건 인간이 된다는 것…. 당신의 그 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인간의 껍데기를 가지고 태어날 뿐이다. 그 안을 채워 진짜 인간이 되는 것은 각자의 일. 자기 안에 집어넣는 내용물에 따라, 우리는 각기 다른 진짜 인간이 된다.

아무튼 안이 차올라 있어야 진짜 인간이다. 그리고 자기 안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다. 나는 당신의 그 관념에 동의하였다.

문득 궁금했다. 나는 얼마나의 진짜 인간인가. 나는 진짜 인간이 되어 가는 일에 얼마나 열심인가. 내가 내 안에 채워 넣은 것들은 다 뭔가. 거기 쓸 만한 게 좀 있는가. 나는 어떤 종류의 진짜 인간인가.

 

지나가는 초등학생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내가 좋은 인간인 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사람이 가진 것,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그 사람을 존중하는 건 인간됨의 일부일 뿐이다. 1%는 될까.

인간이 된다는 것이 새삼 엄청난 일로 느껴졌다. 그러니 본인을 완성된 존재로 보는 일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착각이겠는지….

 

아까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진짜 인간이냐고. 주관을 가지고 자기 안을 채우는 인간이라고 해서 다 좋은 인간인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신념에는 종류가 있다. 사람을 위하는 신념이 있고, 사람을 해치는 신념이 있다. 온갖 종류의 권총들로 자기 내면을 채우는 사람이 있고, 온갖 종류의 상비약들로 자기 내면을 채우는 사람이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전자는 자발적으로 테러범이 되고, 후자는 자발적으로 치유자가 된다. 둘 다 진짜 인간이긴 하다. 둘 다 본인의 선택을 따라 사는 거니까.

 

그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고

끝내 어떤 무엇이 되었다.

 

가장 멀리서 볼 때, 운명은 두 가지 방향을 가진다. 사랑하는 쪽, 사랑하지 않는 쪽.

나는 어느 쪽으로 걷는 인간인가. 내가 넘어질 때 눌릴 수 있는 방아쇠가 내 안에 있지는 않나. 내가 내 안에 마련해 놓은 상비약들로 나는 어느 정도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가. 나는 그것들을 타인에게 얼마나 나누어 줄 수 있는가.

나는 내 세계를 얼마나 오래 끌어안고 있을 수 있는가. 나는 용서하고 연민하는 일에 얼마나의 흥미를, 보람을 가지고 있나. 가끔 길을 잃긴 하지만, 결국 내가 도착하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 내가 궁극적으로 선택한 운명의 얼굴은 어디를 향해 생글거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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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억수로빠른 거북이(turtle7997)VIPVIP 2020-02-13 16:48:42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좋은 인간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
    가슴을 뜨끔하게 하면 서 나는..? 이라는 가슴 아픈(?)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됩니다.^^   삭제

    • 하하호호(culam92)VIPVIP 2020-02-13 15:43:19

      저도 처음만나는 중년분이 갑자기 반말을 해버리면 괜히 그 사람 인성에 대해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제 짧은 경험상 결국 나중에는 부하처럼 취급해버리는분이 많으시디라구요ㅎㅎ 공감을 하며 추천과 후원 드리고 갑니다~   삭제

      • 은비솔99(rose3719) 2020-02-13 11:22:36

        저도 되도록이면 아이들에게도 존댓말을 하려고 노력중인데 잘 안되네요. 존댓말을 하게 되면 말을 함부로 할수 없게 되고 좋은것 같아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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